강신계(講信契) 백주년 기념비 (건립 후록(後錄) 서문)
상태바
강신계(講信契) 백주년 기념비 (건립 후록(後錄) 서문)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3.05.06 16: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리: 김정호 백년커뮤니티 사무국장
경남 거창군 남하면 대야길 81 대아서당

한말, 고종22乙酉(을유)는 서기 1885년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인 바 서기 1885년 전년, 甲申에는 개화파의 정변(갑신정변)이 일어났고 3년전 임오에는 군란이 있어(임오군란) 국내가 어수선하던 시대였다.

이 때 오() ()에서는 조촐한 유림의 모임이 있었으니 장소는 남하면 대야리의 대아서당이다.

강신계(講信契) 백주년 기념비

당시 일촌(一村)이 문운왕성하고 재력유족(財力裕足:여유있고 풍족함)하여 호객범절(好客凡節: 손님접대 예의범절)이 남부럽지 않았으며 지세(地勢) 또한 배산향양(背山向陽:햇빛을 마주 받음)하고 부간청류(俯看淸流)하여 명미한 풍광과 정취를 겸하였으니 선비 강학지소로는 실로 적절했던 것이다.

모두가 여헌(黎獻:백성들 중의 賢者)고가의 동량(棟梁)인 바 38세에서 18세까지의 준재로서 장래가 크게 촉망되던 분들이다.

조석으로 학문을 익히고 때로는 우국충정으로 비분강개의 토론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동지적인 통합이 산회(散會)에 임하여 몹시 섭섭했을 것임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니 이리하여 탄생한 것이 강신계(講信契).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근학책선(勤學責善:양명학에서는 입지, 근학, 개과, 책선을 학문의 방법으로 삼았다, 책선이란 하길 권한다이다)의 붕우지도(朋友之道)를 계속하자는 것이다.

강신(講信)은 신()을 익힌다. 신을 꾀한다 또는 신을 밝힌다로 해석되며 신에 대한 풀이는 교우(膠宇) 선생의 서문에 명확히 나와 있다.

(교우 선생=조선후기 학자 윤주하, 유형문화재 제260<교우문집책판> 저자)

, 신이란 것은 단순히 약속을 지킨다” “신용을 잃지 않는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고 성실을 뜻하는 것이며 이것은 실로, 오향(吾鄕)에 강신계가 있으니 백년전 이곳 대아서당에서 수학하시던 여러 어른들이 산회시에 석별의 정으로 계를 설립한 것이다.

모두가 수재망사(秀才望士)로서 후일 유림의 중진으로 함육교화(涵育敎化:능력이나 품성을 길러 쌓고 갖춤)의 공이 컸으며 그중에 몇 분은 유림파리장서사건에 적극 참여하여 대의를 밝히신 바도 있다.

근학책선(勤學責善)으로 인륜의 도리를 다하고자한 이 모임에 대하여 교우 윤주하 선생은 서문을 지어 격려 하시고, “부모생지이성언자비붕우호(父母生之而成焉者非朋友乎)이라고 붕우지도를 강조하셨다.

이후, 이 취지에 찬동하시는 학덕겸비의 동지 여러분이 추가 입계하여 대중지정(大中至正:크고 치우치지 않고 바름)을 추구하던 수도(修道)의 모임이 차차 유담지장(遊談之場:여흥을 즐기는 장소)으로 격하되었음이 아쉬운 일이다. 다만 우리 선인들의 숭고한 정신만은 계승해야 할 것 아닌가?

후손일동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조상님들에게 흠모할 것을 다짐하면서 유서 깊은 발상지에 삼가 백주년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

갑자년 8월 일

후손일동 건립

강신계백주년기념비명은 현주 김동환이 짓고 노파 김우동이 쓰다.

건립 당시 정씨문중의 건립 장소 반대로 다른 연고지역을 고려하였으나 다시 대아서당에 건립동의가 있어 

19853大雅書堂계원으로부터 부지를 기부 받아 남하면 대야리에 세우고

198541일 건립하고 45일 낙성 고유하였다.

건립부지 번복으로 비문 말미에 강신계의 발상지인 유서 깊은 대아서당에 삼가 백주년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라는 문구가 변경되고 글을 지은이의 이름도 올리지 않게 되어 안타깝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