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장서’ 사건 앞장선 거창儒林 후손…강신계(講信契) 정기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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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 사건 앞장선 거창儒林 후손…강신계(講信契) 정기모임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3.05.05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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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사진: 김정호 백년커뮤니티 사무국장
강신계(講信契) 정기모임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전국적으로도 분포가 많아 조선 시대에 재상을 많이 배출한 대표적 씨족이다.

거창 입향조인 15세 정지운은 14세 양평공(襄平公)의 제4남으로 성주에서 태어나 거창 남하의 무등곡(무릉리)에 자리 잡아 후손들이 세거하며 번성해졌다.

입향조 정지운은 5현의 수현(首賢)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사돈의 인연을 맺을 정도였으니, 그 학문과 덕행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손들도 가풍을 이어받아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충효열 삼강에 모범을 보인 자와 유학에 조예가 깊어 문집을 남긴 자와 과거에 오른 자와 높은 관직에 오른 자들이 매우 많다.

경상남도 거창군 내의 집성촌은 거창군 남하면의 무릉리와 대야리, 남상면의 대산리와 전척리, 마리면의 영승리 장백 마을과 율리 풍계 마을, 웅양면 군암리의 송산 마을이다. 거창군 이외에는 경상남도 함양의 안의와 수동과 지곡, 산청의 생초, 경상북도 청도의 풍각 등지에 산재해 있다.

거창에서 합천 방면 국도 24호선을 타고 15분쯤 진행하면 좌측으로 대야리가 나오며 도로에서 조금 떨어져 거창 삼우당이 있다.

삼우당은 1913년 동래 정씨 진사 금천(琴川) 정시수(鄭時修), 처사 정시웅(鄭時雄), 충의위 정시승(鄭時昇) 3형제의 학식과 덕망을 기려서 세운 재실이다.

정시수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강화가 성립되자 시국을 개탄하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시를 읊으며 보냈다.

삼우당 옆길을 따라 산비탈에 오르면 남하면 대야리 1766에 유서깊은 대아서당(大雅書堂)이 있다. 대아서당은 동래 정씨 문중에서 1810년에 세웠다. 강신계(講信契)를 모아 후손들이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강신(講信)이란, 향약(鄕約)이나 계(), 향회(鄕會) 등의 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우의와 신의를 새롭게 다짐하며 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신계(講信契) 100주년 기념비”

대아서당은 마을 뒤쪽 한적한 곳에 있다. 소나무 몇 그루가 마당을 멀찍이서 두르고 왼쪽으론 작은 계곡물이 감싸 흐르는 고요한 곳에 위치해 있다. 대아서당 초입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강신계(講信契) 100주년 기념비이 기념비에 담겨져 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55, 거창군 남하면 심소정에, 선산 김, 파평 윤, 동래 정, 밀양 박, 전주 이, 밀양 변씨 후손들이 모였다. 이들은 1885(고종 22乙酉) 결성된 강신계(講信契) 계원들의 후예들이다. 당시 강신계(講信契) 계원들은 파리장서 사건에 깊이 간여, 일제로부터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유사 파평윤씨 윤형묵

이날 심소정에서 모임을 가진 강신계 후손들은, 선조의 얼을 기리는 한편, 향후 각종 학술행사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파리장서의 주요 내용

역사의 시계바늘을 돌려 1885년 그때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파리장서는 무엇이며 강신계는 파리장서와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 결성 모임 유림들은 누구였는지? 그 비하인드스토리를 알아본다.

파리장서

1885년 당시의 국내정세는 어땠을까?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조선은 청, ,러시아 등 외세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나라전체가 풍전등화 신세였다. 이때 거창군에 거주하는 유림(선산 김, 파평 윤, 동래 정, 밀양 박, 전주 이, 밀양 변씨)들이 모여, 국난극복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다. 그들은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함으로써 거창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파리장서 사건이란? 전 세계에 일제 만행을 알리고 조선 독립을 호소한 '파리장서 독립청원운동'을 말한다.

3·1독립선언서 발표 후 조선의 독립 정신을 세계에 알리고자 유림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글이 '파리장서'. 파리에 보내는 장문의 서한이라는 뜻이다.

일본 유학생이 발표한 2·8독립선언, 3·1운동에 이은 독립 선언운동으로, '파리장서 독립청원운동'으로 일컫는다.

침유정

파리 장서사건은 유림 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린다.

1차 유림단사건은 1919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인사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내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3·1 운동 이후 유림의 인사들은 유림이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대신하여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였다. 한국의 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명이 김창숙의 연락으로 독립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이 이 탄원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412일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에 의해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후, 곽종석 이하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망명하였다. 곽종석, 하용제, 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그 밖의 사람들도 형에 못 이겨 죽고 또 처형되었다.

파리장서비

장서의 주요 내용은 한국은 삼천리 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한국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고,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파리장서 사건 발발시 거창군 유림들이 가장 활발하게 반일투쟁을 전개했는데, 밀양 박 박종권(朴鍾權파평 윤 윤철수(尹哲洙), 밀양 변 변양석(卞穰錫파평 윤 윤인하(尹寅夏), 전주 이 이승래(李承來), 선산 김 김재명(金在明)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재명은, 당시 거창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 윤주하의 문집 교우 문집을 제작시 교정 교열작업에 참가한 유림이기도 하다.

변양석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에 활동하였던 거창 지역 유생으로, 윤주하(尹胄夏)와 장복추(張福樞)에게서 배웠다윤철수(尹哲洙)(1868~1942)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순명(舜明) 호는 해관(海觀)이다.

일제치하, 파리장서 사건에 연루된 우국지사들의 삶은 비참했다. 세월이 흘러 이들은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한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 포장이 수여되었다.

거창군 남하면 심소정에, 모인 1815년 결성한 강신계(講信契) 선산 김, 파평 윤, 동래 종, 밀양 박, 전주 이, 밀양 변씨 후손들

55, 거창군 남하면 심소정에, 모인 1815년 결성한 강신계(講信契) 선산 김, 파평 윤, 동래 정, 밀양 박, 전주 이, 밀양 변씨 후손들은 자랑스런 조상님의 얼을 기리며, 조상님께서 가르치신 이른바 존심양성:存心養性:그 마음, 良心(양심)을 잃지 말고 그대로 간직하여, 그 성품, 즉 하늘이 주신 본성을 키워 나감)의 이치를 잘 보전하고자 다짐을 했다.

강신계 후손들은 1984년 추원당 강신계 회의에서 동래 정씨, 정연학의 제안으로 강신계 100주년 기념비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기념비 비문은 노파 김우동 서예가가 썼다. 1985년 강신계후손들은 대아서당 계원으로부터 부지를 기부 받아 현재 남하면 대야리에 기념비를 세운다.

한편 강신계 후손들은 매년 55일 한자리에 모여 조상의 뜻을 기리고 우의를 교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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