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 안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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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 안치환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0.01.2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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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관리공단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사진=윤병춘 작
강성국 작

 

누구의 원한이랴
죽음의 저 산 내사랑아
피 끓는 정열을 묻고 못다부른 참 세상은
누구의 원한이랴
침묵의 저 산 지리산
일어서는 저 산 지리산  
(- 남겨진 상처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서 -
- 못다한 사랑을 목놓아노래하랴 -)

 


지리산    반란의 고향

푸르른 저 능선 저 깊은 골에 찢겨진 세월의 자욱
무엇을 주저하랴
부활의 저 산 솟구치는
대지의 거친 숨소리 눈부신 조국의 하늘
무엇을 주저하랴
투쟁의 저 산 지리산
다가오는 저 산 지리산 / 살아오는 저 산 지리산
(-남겨진 상처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서-
-못다한 사랑을 목놓아노래하랴-) 
지리산    반란의 고향

-안치환

 

-칼럼

 

 

지리산은 수행자들의 산!

개운조사 탄공 대선사 행장기

 

글|구본갑 여행작가 busan707@naver.com

 

우리 민족 영산 백두산 정기는 남으로 뻗어 내려 오면서 수많은 산봉우리들을 솟아냈다.

드디어, 저 멀리 남해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남은 힘을 쏟아 부어 힘차게 우뚝 일어서니 남 녘 땅에서는 가장 높은 지리산(智異山)이 된다.

지리산은 장엄한 산이다. 동서의 길이가 무려 2백여 리나 되고, 남북이 1백여 리에 이르며 높이가 해발 1,915미터인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장엄한 산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지리산은 가장 높은 뫼란 의미를 지닌 두류산으로 불리어졌다. 두류란 높다는 뜻과 머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리산엔 옛부터 숨어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속세를 떠난 은자들의 자취가 지리산 속살 곳곳에 남아 있다.

예언서 감결에는 지리산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 내용이 나온다.

 

"1만이나 되는 문수보살이 두류산에 항상 머물고 있다. 두류산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화평하다. 세속을 벗어나 깊숙이 숨어 살고자 하는 이들이 이 산을 많이 찾으리라. 훌륭한 도인, 빼어난 선비들이 무수히 이 산으로 들어와 도()를 논하리니 훌륭하도다. 참으로 훌륭하도다"

 

이러한 감결서의 예언처럼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지리산으로 들어 왔다. 도인이나 공부를 많이 한 선비 뿐만 아니라 세도가의 잘못된 권세에 시달리던 백성들과 올바르지 못한 권력자에 정의로 항거하다 쫓겨 온 의인(義人)들이 지리산에서 새 삶을 꾸렸다.

이상향을 이르는 길을 찾는 많은 수행자들이 지리산에 들어왔다.

김수로 왕의 일곱 왕자가 들어 와서 깨달음을 얻어 성불(成佛)하고부터, 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었고, 그들이 머물던 자리에, 지금도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리산 어딘가에는 푸른 학이 훨훨 날고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청학동(靑鶴洞)’이라는 낙원이 있다는 얘기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청학동은 본래 청학동이 아닌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는 누군가가 청학동을 다녀왔다는 뜬소문이 안개처럼 떠돌기도 하고, 청학을 타고 노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보았다는 이도 있었다.

고려시대엔 문인 이인로가, 조선시대엔 김종직, 김일손, 유운용 등이 지리산을 답사하며 청학동을 찾으려 애를 썼으나 아무도 청학동이란 이상향엔 이르지 못했다.

청학동은 수행자들만의 꿈속의 이상향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어딘가에 정말 있는 초월 세계인가. 오늘날 이 시점에도 지리산 속살 곳곳에는 선도(仙道)를 수련하며 청학동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개운조사와 묘향대

 

지리산 반야봉에 있는 묘향대에 묘향암(妙香庵)이란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 묘향암은 그야말로 아주 작고 조촐한 암자이지만 그 터가 예사롭지 않다.

묘향암은 해발 1,485미터에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 묘향암은 지리산 주맥(主脈)을 한 아름에 품고 있는 형상이다. 묘향암 터는 지기(地氣)가 매우 강한 곳이다. 그러므로 선계(仙界)의 기운이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다.

수행자들이 친견하지는 못했지만 영원한 멘토인 개운조사(開運祖師)라는 대도인 한 분이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에 선계의 기운이 서려 있는 묘향대에 와서 살았다.

개운조사.

이 분만큼 세상에 신비로운 일화를 남긴 고승도 없다.

개운조사의 행장을 보자. 개운조사는 1807(1790년 또는 1730년이라고도 함)에 경상북도 상주군 개운동에서 출생했다. 속성(俗性)은 김씨(金氏)였고, 어머니는 양씨(楊氏)였다.

개운조사는 세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섯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어려서부터 천애고아가 되었다.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상주읍에 살던 외삼촌이 가엽게 여겨 개운조사를 데려다 길렀다. 외삼촌 부부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어린 조카를 친자식처럼 돌봤다. 고아가 되었지만 다행히 외삼촌 부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되나, 개운조사가 일곱 살 때 외삼촌이 돌아가시게 되고 외숙모마저도 외삼촌의 삼년상을 마치자마자 돌아가셨다. 그 때가 개운조사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어린 개운조사는 혼자서 외숙모의 삼년상을 치렀다.

외숙모의 산소 앞에 묘막을 짓고 삼 년 동안 시묘살이까지 했다. 개운조사의 지극한 효심에 이웃 사람들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은 외삼촌이 양씨 라서 개운조사를 효성이 지극한 아이라고 양효동(楊孝童)이라고 불렀다. 어린 개운조사에게 죽음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 갔다. 겨우 아홉살 아이가 피붙이 하나 없이 혈혈 단신이 되었으니 그 슬픔과 외로움은 얼마나 컸으랴.

개운조사에게는 죽음이란 문제보다 더 두려운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개운조사는 사람이 죽음을 이기는 길이 없는가? 늘 궁금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이 없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어른들은 어린 아이가 별 걸 다 묻는다고 무시했으므로 양효동은 마을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만 되었다.

개운조사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죽지 않는 길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스님 한 분을 길에서 만나는데, 그 스님이 죽음을 이기는 길이 있다고 대답했다. 양효동이 그 길이 어떤 길이냐고 묻자 스님이 되어 불법 잘 닦으면 죽음을 초월한

개운조사는 바로 희양산 봉암사를 찾아 갔다.

봉암사에서 혜암 선사를 은사 스님으로 모시고 승려의 길로 들어섰다. 이 때 개운조사의 나이 열세살이었다.

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던 봉암사는 선풍(禪風)을 떨치며 숱한 고승대덕을 배출한 수행도량이었다. 봉암사의 드높은 수행 기풍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개운조사가 입산한 지 일 년 후에 스승인 혜암 선사께서 열반에 들었다. 은사 스님까지도 너무 일찍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을 공부하려고 입산해서 승려가 되었는데 스승마저 돌아가셨으니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개운조사는 다른 스님들로부터 봉암사에서 불법을 공부했다. 열아홉 살까지 경학도 배우고 참선도 익혔다.

 

 

 

그러나 봉암사에는 죽음을 초월한 스님도 없고, 죽음을 이기는 길을 가르쳐 주는 스님도 없었다. 개운조사는 늘 아쉬웠다. 죽음을 초월하여 자유자재한 삶에 이른 큰 스승을 만나 죽음을 이기는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열아홉살 때. 개운조사는 큰 스승을 만나기 위해 봉암사를 떠나 만행을 시작했다. 그 후 11년 동안 만행을 계속했지만 고대하던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어느덧 나이는 서른이 되고 개운 조사는 만행 중에 이곳 저곳 분주히 다니면서 쓸데 없이 신발만 닳게 한다는 옛 선사의 시구를 읽고는 자신의 모습이 그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바로 봉암사로 돌아왔다.

봉암사에는 환적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개운조사는 환적암에서 침식을 잊고 용맹정진했다. 오로지 부처님께 참스승을 인연되게 해 달라는 기도만 열심히 바쳤다.

기도 수행 중에 이상한 현상들이 계속되었다. 별의별 환상들이 개운조사의 기도 수행을 방해했다. 눈 앞에 황금덩이가 놓여 있는가 하면, 아주 아름답고 이쁜 여자가 요염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큰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기도 했고, 무서운 모습의 호랑이가 포효하듯 큰 입을 딱 벌리고 다가오기도 했다. 때로는 불한당이 문을 부수며 방안으로 침입하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고, 갖가지 진귀한 산해진미가 차려진 밥상이 불쑥 나타날 때도 있었다.

 

 

개운 조사는 진귀한 음식을 봐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며, 호랑이가 다가와도,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아도 무섭지가 않았다. 이쁘고 아름다운 여자가 요염한 자태로 유혹을 해도 덤덤할 뿐이었다. 황금은 그저 돌로 보였다.

이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수행하던 중에 하루는 웬 거지같은 차림을 한 노인이 환적암으로 왔다. 옷은 헤어지고 바랜 누더기 차림이고, 몸에는 부스럼과 종창이 나서 진물도 흘렀다. 노인의 옷과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까지 진동했으나 개운조사는 이 노인을 반갑게 맞이하며 환적암에 머물게 하고 극진히 봉양했다.

그런데 노인의 성품은 아주 괴팍하고 난폭했다. 자신을 잘 봉양해 주는 개운조사한테 이유없이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마구 때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개운조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때로는 노인이 마음이 달라졌는지 개운조사를 칭찬하고 찬양까지 했지만 개운조사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노인이 온지가 한 달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개운조사에게 너는 정말 마음을 잘 비웠구나. 그동안 못 살게 굴어도 화를 안 내고, 칭찬해도 기뻐하지 않으니 마음을 참으로 잘 닦았구나. 크게 깨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너가 부처님께 애타게 기원하고 있는 것이 무었이더냐?” 라고 묻자 개운조사는,

참 스승을 만나 부처님의 법을 잘 배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노인이 재차 물었다.

내가 너 스승이 되면 어떻겠느냐?”

그 순간에 개운조사는 바로 이 분이 그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큰스승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개운조사는 감사하다면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여러번 쉬지 않고 큰 절을 올렸다.

노인은 쾌히 허락하고는 개운 조사를 희양산 중턱으로 데려갔다.

거기엔 마당만한 너럭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 두 사람이 올라서자 잠시 뒤에 아담한 암자 하나가 저절로 생겨나는 이적이 일어났다.

개운 조사는 이 암자에 노인과 함께 머물면서 노인의 가르침대로 수행에 전념했다. 끼니 때가 되면 먹을 음식이 저절로 생겼다. 갈증이 나면 물도 저절로 생겼다.

개운 조사는 암자에 지낸 지 일주일 만에 온갖 욕망이 겉으로 일어나지 않고 욕망에 따른 행동을 전혀 하지 않게 된다는 불교 수행단계 중 첫 번째 경지인 간혜지를 얻었다.

노인은 개운조사가 간혜지를 얻자, 능엄경이란 책을 건네주고 어디론가 떠났다. 노인은 떠날 때 작별을 고하더니, 새처럼 푸르른 하늘 위로 날아가는 기막힌 이적을 보여줬다.

노인이 떠나자 암자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개운 조사는 백운암으로 내려와 계속 정진했다. 백운암에서 백일 만에 불교 수행의 두번째 단계인 수다원과를 얻었다.

수다원과를 얻어야 비로소 성스러운 깨달음의 세계에 입문한 것으로 여긴다.

 

 

개운조사가 남긴 도장산 주먹 글

 

수다원과를 얻은 개운조사는 좀더 한적한 수도처를 찾아 도장산(道藏山 속리산과 붙어 있는 산) 심원사로 옮겼다.

도장산에 오고 몇 년 후에 수행의 세 번째 단계인 사다함과와 네 번째 단계인 아나함과를 얻었다.

일명 불래(不來)’라고도 불리는 아나함과를 얻으면 윤회의 업보에서 벗어난다. 육신을 지닌 존재로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오지 않기 때문에 불래라고 한다.

<유가수련증험설>에 있는 글에 의하면, 아나함과를 얻으면 붉은 피가 하얀 기름으로 변하고, 입에서는 진기한 맛이 느껴지고, 코에서는 아름다운 향내가 감돈다. 흰머리는 검어지고, 빠졌던 이가 다시 난다.

투시하는 능력이 생겨서 사람의 몸 속이나 땅 속이 훤히 다 보인다. 어둠 속에서도 올빼미처럼 대낮처럼 모두 다 볼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의 병을 손대지도 않고 기운으로만 고치고, 입김으로 수은을 말린다.

추위와 더위를 타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바위에다 글씨를 새긴다.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립지 않다. 죽음이 물러간다. 피부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아나함과를 얻은 개운조사의 모습은 신선의 풍모와 비슷했다.

개운 조사 주변에 많은 이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양봉래(楊蓬來 이름은 사은)가 출현했다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장산으로 몰려왔다. 이때가 개운 조사 쉰한 살이었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와서 오래도록 선정(禪定)에 들기가 어려워지기에 도장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개운 조사는 도장산을 떠나기 전에 스승한테서 받은 <능엄경>에 주석을 달았다. 책의 뒷부분에 자신의 이력을 써넣기도 했다. 지리산 묘향대로 떠난다는 말도 썼다.

개운 조사가 맨손으로 글씨를 새긴 바위는 속리산 동편인 경북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에 있다. 글씨는 지금도 그대로 있다. 개운 조사는 도장산을 떠날 때 신비로운 이적을 보여줬다.

개운조사는 도장산을 떠나던 날 개운 조사는 친구와 바둑을 두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바둑알을 놓았다. 개운 조사는 바둑을 마치자 친구에게 멀리 떠난다고 말하면서 작별을 고했다.

떠난다는 말을 하고는 바둑알 몇 개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개운 조사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개운 조사가 앉았던 자리에는 바둑알 몇 개만 남아 있었다.

개운 조사는 지리산 묘향대에서 아라한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도장산에서 아라한과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죽을 사람도 30년 수명 연장

 

 

 

 

아라한과를 얻은 이는 죽음도 초월한다고 한다. 아라한 경지에 오른 이를 선도에서는 선인(仙人) 또는 진인(眞人)이라 부른다. 지리산은 아라한 또는 도학 군자, 선인들이 모이는 선기가 충만한 명당터일까. 그 중에서도 묘향대는 개운 조사가 포행과 수행한 터이므로 지리산 속살 중에서도 더욱 선기가 충만하리라.

풍수사 야은 거사는 118세로 좌탈열반한 탄공선사의 제자이다. 그에 의하면 탄공 선사가 경상북도 학가산에서 개운 조사를 처음 만나서 길에서 7배를 올렸더니, 개운 조사께서 합장을 하며 자타일시견성성불(自他一時見性成佛)하시고는 자네는 불문에 참 잘 왔다 하시면서, “앞으로 백세상수(百歲上壽)할테니 백세가 넘으면 벽사서화로 대중을 많이 구하시게라고 당부하시면서 탄공선사가 약관 19세 때 고종황제 때 전국화공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사실도 알고 있더라는 것이다.

118세 탄공선사 좌탈열반상

 

 

야은 거사 증언에 의하면, 탄공 선사가 개운 조사의 제자가 된 후에 개운조사께서 쓰신 벽사서는 죽을 사람도 30년은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한다.

개운 조사께서 가끔 막걸리를 마시는데 막걸리를 잔에 부어 마시지 않고 옹기 항아리 채로 마시고는 안주는 천일염을 조금 드시면서, 때로는 미역귀나 삶은 까만 돼지고기를 안주로 드셨다고 한다.

풍수사 야은 거사가 스승인 탄공 선사에게 개운 조사님의 모습을 여쭈었더니 개운 조사의 모습은 백세가 훨씬 넘었셨는데도 50살 정도의 젊게 보이셨다고 한다.

필자도 탄공 선사께서 115세 때 야은거사 소개로 친견한 바 있는데 전 날 지리산에 갔다 오셨다면서 시자가 드린 보이차를 마시는 모습이 50년은 젊어 보였다.

그때 탄공 선사의 얼굴빛은 황백색이었으며, 귀는 크시고, 눈에는 공채가 났으며 코는 쌍기둥이 있는 것처럼 순골쌍주(純骨雙柱)이고 이마는 넓으신 일각월현(日角月懸)의 상이었다.

 

 

 

믿기지 않는 이적 하나

 

 

 

 

 

고 정주영 현대회장, 대통령선거 당시 충북 청원 탄공정사로 가 선사를 친견, 대권운을 물었다

 

 

탄공선사님이 대전 부근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허리와 골반뼈를 많이 다쳐 대전 병원 응급실에 있는데 청주에 사는 신도인 수동 보살이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가서 보니, 상태가 매우 안 좋아서 그 다음 날 담당 의사에게 문의했더니, 백 살이 넘은 노인이라 약 3년 정도 있어야 쾌유 된다고 말해서 입원실에 입원 치료를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수동 보살이 미음을 쑤어 탄공 선사님의 공양으로 올렸는데 10일 되는 날 아침 공양을 준비해서 병실로 가보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선사님이 보이지 않고 빈 침대만 있는게 아닌가.

수동 보살이 하도 기가 막혀서 간병하던 시자에게 선사님은 어디 가셨나?”라고 했더니 시자도 모르겠다면서 자고 나니 선사님이 안 계시더랍니다. 탄공선사님께서 당시 2인실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옆 침대 환자에게 혹시 본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지난 밤 12시경에 두 사람의 노인이 선사님을 단가에 눕혀서 모시고 나갔다고 말했다.

탄공선사는 그 후 한 달 동안 소식이 없다가 약 한 달 만에 청주에 있는 수동 보살 집으로 오셨다. 병원에서 3년 진단이 난 환자가 종적을 감춘 지 한 달 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온 걸 보고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수동 보살이 물었더니 지리산에서 있다가 왔다라고 답변했는데, 후일에 제자인 야은 거사가 사부님, 대전에서 교통사고 났을 때 지리산 어디에 계셨습니까?” 여쭈었더니 나의 스승인 개운 조사님께로 가서 치료를 20일간 받았지라고 하셨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3년 진단이 난 교통사고 환자를 20여일 만에 치유했다는 것은 현대 의학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탄공 선사는 제자 야은 거사에게 개운 조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걸은 지령이니 지리산 묘향대에서 나오는 기운이 특별하니 늘 묘향대에서 기도 정진하라고 당부하셨다.

지리산에서도 묘향대는 성스러운 기운이 충만할 것이며 앞으로도 선기(仙氣)가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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