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총선 산청함양거창합천 ,국회의원 무소속 후보, 신덕재 풀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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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총선 산청함양거창합천 ,국회의원 무소속 후보, 신덕재 풀스토리
  • 조 광환 기자
  • 승인 2024.03.01 2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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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업계 CEO, 大權 도전하리라

제2부 학창 시절

내 인생 최초의 선택

 

마을 구장 일을 오래 하셨던 아버지는 교육열이 남달랐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학교에 들어가는 돈만큼은 꼭 마련해 주셨다.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초등학교 때는 특별히 성적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수, , , , 가로만 평가되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중학교에는 석차라는 것이 있어서 성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결과는 특출하진 않았지만 250여 명 중에 16등을 해서 상위권에 속했었다.

그 후 학교 성적이 한 반 60명 내외의 급우들 가운데 10등 안쪽이었으나 복잡한 것을 싫어했던 탓에 영어나 수학, 한문 과목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반면에 암기 위주로 했던 국어, 사회, 도덕, 등의 과목은 쉽게 공부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최소한의 내 자신의 동기 부여가 있었거나 옆에서 이끌어 주는 조력자가 있었다면 아마도 좀 더 좋은 성적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친구들과는 격의 없이 지냈지만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눈에 특별히 띄지는 않았던 평범하고 소극적인 학생이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김홍균 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별명이 싱겁이 선생님이었다. 한번은 수업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덕재야, 여학생 반에 가서 이동식 칠판 좀 가져오너라.’

나는 선생님이 시킨 심부름이었지만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쭈뼛거리며 여학생 반으로 갔다. 그리고 열린 교실 문 안으로 살살 엎드려 들어가서 칠판을 살며시 끄집어내곤 냅다 뛰었다.

, 이 녀석아! 도둑질한 놈처럼 왜 그렇게 도망을 치냐?’

여학생 반에서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숫기가 없었던 나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문제를 내고 아는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하면 알면서도 손을 들지 못하였다. 급우들 앞에 나가서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해야 하는 음악 실기 시간이 부담스러웠을 정도로 소심한 아이였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TV가 있는 곳은 마을에서 한두 집에 불과했다. 그래서 항상 온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TV를 시청하곤 했었다. 특히 김일 선수가 레슬링을 할 때면 면소재지인 장기리까지 원정 가서 보고 오기도 했다. 친구 신행범이 집에 가서는 관람료를 몇 원 내고 시청하기도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도 텔레비전을 샀다. 양쪽 다리가 4개 있고 브라운관 앞을 열고 닫는 작은 문이 있는 삼성 이코노 흑백 TV였다. 관람료를 내고 보지 않게 되어 좋았다.

텔레비전이 집에 들어오고 이내 전화기도 설치했는데 옆쪽 손잡이를 돌려 교환원이 나오면 어디에 아무개를 바꿔 달라는 교환식이었다.

어디를 바꿔 드릴까요?”

교환원이 이렇게 물으면 동네 형들과 나는 전화 수화기에 대고 뿌우웅 방귀를 뀌고 배를 잡고 깔깔대고 웃었다

 

 

.

아버지는 학교 성적에 관한 한 굉장히 엄해서 자식들의 성적이 기대치 이하로 떨어지면 책가방을 불 아궁이에 집어넣으셨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책가방이 아궁이에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엄하고 어려워 나는 단둘만의 대화는 거의 하지 못하고 자랐다. 아버지한테 업혀 본 기억도, 다정한 말씀을 들었던 기억도 별로 없지만 반대로 어머니는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무조건 자식들 편이셨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고교 진학을 선택해야 할 즈음 형이 대학 입학시험에 낙방을 했다.

 

유교적 가풍을 가진 집안의 종손이었던 형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가 워낙 컸었기 때문에 형의 대입 실패는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말았다. 이후 형은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재수를 거쳐 삼수를 했지만 끝내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지극 정성을 기울이는 형이 가끔은 부러웠다. 대학을 꼭 보내고야 말겠다는 아버지의 그 관심과 사랑에 약간은 질투가 났다. 장남에게 기울이는 사랑의 절반이라도 동생들과 함께 같이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러 하곤 했다.

 

아버지의 관심 밖에 있다고 생각한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가난 때문이었다. 뭐든 부족해 보이는 가난이 너무 싫었다. 어서 빨리 사회로 나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싶어서 내 앞길의 최초 선택을 스스로 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거창읍으로 내려와 원상동이란 곳에 사글세방을 하나 얻었다. 조금은 자유스럽고 조금은 설레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진학한 거창상업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근처에는 문정희, 문필범, 김용우 등의 초중학교 동창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그 친구들과는 달리 할머니가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매주 혹은 격주로 12km가량 떨어진 위천 황산에 있는 본가에 가서 먹을 쌀과 필요한 용돈을 타 오곤 했다. 3 때는 혼자 자취를 했다. 그 덕분에 쌀을 먼저 넣고 물이 끓으면 라면을 넣어 만든 라면죽을 많이도 먹었다.

1년에 한 번씩 세 번 자취방을 옮겼는데 그때마다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고등학교 2, 3학년 때는 우리 학교는 아니지만 현직에 계시는 선생님 댁에서 살았다. 그 때문에 조금은 주의해서 행동하는 학창 시절이 되었다.

어쩌다 어머니께 거짓말을 해서 돈을 타내기도 했다. 핑계는 늘 책값이거나 준비물 값이었다. 영어 공부에 필요하다고 어머니를 졸라 녹음기를 하나 사던 날은 꼭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녹음기를 산 이유는 유행가도 듣고 친구들과 장난도 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탓에 학업을 안일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다.

 

그즈음의 나는 사춘기였다. 인생이니 사랑이니 가치관이니 뭐 이런 것들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우연한 기회에 가게 된 위산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는 우주만물과 생명에 대한 신비를 고민하며 절대자인 신의 존재 여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인생의 목표에 신과 종교라는 가치관이 하나 더 얹어지는 순간이었다.

 

주택복권 3장만 주세요.”

복권을 달라는 말에 가게 주인아저씨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한꺼번에 많은 돈이 생긴다면 부모님 고생이 일순간에 확 달아날 거다.’

다소 엉뚱한 생각일 수 있지만 소발에 쥐 잡는 식으로 당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고생하는 부모님에게 힘이 돼 주고 싶었지만 당연히 복권은 당첨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희미하게나마 사람이 노력하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욕심을 부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얼마 후에 나는 쌍림문이라는 쿵푸 도장에 입관했다. 당시 이소룡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었다. 입관비는 그때 돈으로 1,000원이었고 회비는 3,000원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보내 주시는 용돈에서 일부를 떼어낸 돈이었다. 쿵푸 도장에서 운동하는 외에도 자취집에서 틈틈이 비지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다. 지금의 체력이 다져진 이는 아마 그때 했던 운동 덕분인 것 같다. 꽤나 열심히 했다. 아마도 땀 흘린 뒤의 개운함을 그때부터 알았던 듯싶다.

 

달걀에서 깨어나는 병아리의 아픔

 

할머니가 고향집으로 가시고 나 혼자 자취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적당히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많아졌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웠다. 특히 이현용이라는 친구와 절친하게 지냈다.

1979724일 고3 여름방학 첫날, 현용이와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이 그리 심각했는지 소주잔을 기울이며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여름방학 때 취업 나간다.”

말을 하는 현용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니, 어쩌면 달빛 없는 흐린 날이라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친구의 어조가 한없이 낮아졌다는 것이었다. 취업, 어느새 우리는 앞날을 걱정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건 친구 현용이의 고민이자 내 고민이기도 했다.

 

고교 시절 내내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애초에 상업고교를 선택했던 취지대로 취업을 나가기로 결심하고 그해 1012일 부모님이 계신 울산으로 갔다. 농사짓는 큰아들을 안쓰럽게 여기셨던 할머니가 부산에서 우유대리점을 하시는 작은아버지를 졸라 부모님을 울산으로 가게 하신 것이었다. 그날은 마침 소풍을 간다고 학교 전체가 떠들썩하던 날이었는데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학교를 떠나야 했다.

 

언젠가 달걀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본 적이 있다. 비록 어눌하고 어설픈 몸짓이었지만 병아리는 기어이 제 몸을 둘러싸고 있던 껍데기 밖으로 나와 두 발을 딛고 일어섰다. 아픔이 꼭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리하여 그것이 진정한 아픔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아픔이 성취의 전 단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달걀에서 깨어나는 병아리의 아픔처럼, 진정한 나 자신으로 깨어나기 위해 설렘과 불안감을 안고 미지의 사회생활로 들어서기로 한 것이다. 1017일 이일형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취업증명서를 전해드리고 정식 실습인정을 받아 곧바로 울산으로 왔다. 실질적으로 학창 시절이 끝난 것이다.

그 후 내가 다시 모교를 찾은 것은 무려 27년이나 흐른 20051222일이었다. 성공을 하면 반드시 다시 찾겠다던 결심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내 젊은 날의 열정과 고민과 번뇌가 곳곳에 스민 교정의 정겨운 느낌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어떤 파노라마가 펼쳐질지, 어떤 여정을 걸어갈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 채 나는 내 인생의 파란만장한 고독한 첫발을 그렇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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