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 전투의 깊은 의미,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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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성 전투의 깊은 의미, 바로 이것이다
  • 조 광환 기자
  • 승인 2024.03.01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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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양기상 황석산성 성역화 추진위원회 홍보국장

 

함양 황석산성(咸陽 黃石山城)은 함양군 서하면에 있는 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에서 뻗은 산마루를 따라 골짜기를 감싸며 육십령으로 통하는 요새지에 쌓은 삼국시대 산성이다. 198791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 322호 황석산성으로 지정되었고,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에서 뻗은 산마루를 따라 골짜기를 감싸며 육십령으로 통하는 요새지에 쌓은 삼국시대 산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쳐 쌓았고 임진왜란 때는 큰 전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성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으로 쌓은 부분으로 되어있고, 문은 동···북동쪽에 있다. 성 안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엔 성의 둘레가 29,240(8.9km)이며, 성 안에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선조 30(1597)에 왜군이 침입하자 이원익은 왜군이 쳐들어올 것을 판단해 주민들과 성을 지켰으나 백사림이 도망가자 결국 함락당한 사연이 있는 성이다. 현재도 성 안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기에 전략적으로 가치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선조 30(1597) 왜군이 다시 침입했다. 이름하여 정유재란.

 

정유재란(丁酉再亂)15978, 일본국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12월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초기에는 일본군의 공세가 이루어지다가, 명량 해전을 변곡점으로 남해안의 왜성(倭城)들에 틀어박힌 일본군에 대한 조명연합군의 공격 양상을 띠었다. 때문에 정유재란 때 조선군은 대부분 공격측, 일본군은 대부분 방어측에 서게 되었고, 명량 해전과 노량 해전을 제외하면 조선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둔 전투는 거의 없는 교착전쟁의 모습을 나타냈다.

 

 

정유재란 당시(159년 음력 816-18일간), 이른바 황석산성 전투가 발생했다.

당시 백성 관리 관군 부녀자 등 7000여명이 칼과 창 활 돌로 왜군과 처절하게 맞써며 10배가 넘는 왜군과 대적해 황석산성에서 싸웠다.

 

전투 사흘째인 817일 자정 무렵, 왜군의 파상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성안의 아낙들은 나뭇가지까지 주워 기름을 끓이고, 기름이 떨어지면 물을 끓였다. 나이 든 남정네는 돌과 끓은 물, 기름을 날랐고, 장정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들에게 던지고 부었다. 병졸들은 화살을 쏘고 칼과 창으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자들을 찔렀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잘 훈련된 병력과 화력 앞에선 중과부적이었다.

 

 

 

이 전투에서 암음현감 곽준, 함양군수 조종도, 거창군수 유명개 등의 큰 노력과 백성들이 장열히 숨지는 희생이 있었다. 성은 기어이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말한다. “황석산성은 백성들의 힘에 의해 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시인 구상은 황석산성 전투 충혼비 비문에 이런 글을 썼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싸움에서 이런 충의와 충용과 충절에 빛나는 호국의 충혼을 찾을 것인가.”

 

황석산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대단하다.

 

박선호 역사연구가에 따르면,“ 황석산성을 공격한 모리대루모도의 우군은 전주성에서 북진하여 조명연합군의 전라도로의 진입을 차단하여 남쪽 4도를 분할해야 하는데 황석산성에서 너무나 큰 피해를 당하여 북진을 하지 못하고 남원성을 공격한 죄군이 북진을 함으로서 좌군이 전주성을 입성하는 820일부터 우기다히데이에이가 북진 후 전라도로 돌아오다가 전북정읍에서 2차재편성을 하는 816일까지는 거의 한 달간이나 전라도는 일본군이 없는 군사적 무주공간이 되었는데 이 순간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명량대첩을 준비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모리데루모도가 황석산성에서 816일 부상을 당한 후 북진을 위한 전주성의 재편성에서부터 지상군 총대장이 된 우기다히데이에가 전남고흥에 도착하는 919일까지 명량대첩에 대한 상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박선호 역사연구가는 황석산성 전투는 조선팔도 분할과 7년 임진대전쟁을 종식시킨 전투라며 대첩비세우기를 주장한다.

 

황석산성 역사 찾기 운동본부 유성기 회장은 황석산성 역사·문화적 가치와 활용 방안을 통해 황석산성전투가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시 친명사대주의사관에 물든 조선 지도층의 잘못된 역사인식과 그 후 일제의 계획적인 사건 은폐에도 원인이 있지만 우리 함양사람들과 후손들의 책임도 크다성역화를 달성한 금산의 칠백의총이나 남원의 만인의총의 사례를 고찰하며 그 분들이 기울인 끈질긴 노력과 열정을 벤치마킹해 우리들의 오랜 숙원인 황석산성 성역화에 활용하자고 제언했다.

 

황석산성전투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역화 , 학술심포지엄, 유적 정비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황석산성 성역화 추진위원회가 지난 1228일 발족됐다.

 

추진위원회 측은 우리 민족의 국가 수호정신이 깃들어 있는, 황석산성전투 그 의미를 뒤돌아 보고자 추진위원회를 발족한다, 추진위원회는 황석산성 성역화를 통해 그동안 묻혔던 황석산성 전투의 진실을 알리고 황석산성 전투를 재조명하여 유명을 달리한 7천여 혼들을 위로하고 성역화 작업후에 많은 국민들이 역사현장을 추모할 수 있게 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황석산성 성역화 추진위원회 대표는 천사령 전 함양군수가 맡았다. 부대표는 김성기 전 함양군교육장, 임지택 전 안의중학교 교장 등이다. 고문으로는 김경두 안의향교 전교, 김윤세 인산죽염 회장, 노진환 전 서울신문 사장, 박선호 황석산성 연구소장, 오일창 전 함양군교육장, 유성기 경영학박사, 이동원 전 안의중교장, 자문으로는 김윤택, 양인호, 정광석 함양군의원 사무국장 백인종 교육학박사. 사무차장 이영철 서부경남 신문 사무차장 전인배 전 농협 조합장 . 홍보국장 양기상 함양 씨름 협회장.홍보차장 김영환 문화해설사. 홍보차장 박유미 용추아트밸리 .홍보차장 박진규 함양사진협회 . 감사 신용준 안의면 이장협회 회장.감사 오복식 대학 교수.

최근들어 황태진 전 함양군의장, 조재일 전 함양경찰서 경찰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말한다. “황석산성 전투의 역사적 사실을 정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을 통한 역사적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황석산성 전투는 나라의 지시나 명령이 아닌 내 가족,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민들이 목숨을 내걸고 항거했다. 이 사실을 전 국민들에게 알리면 교육적으로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석산성 성역화 추진위원회 제2차 모임.

오상철 작 천하를 호령하다’(경남 함양 황석산성).

 

함양군은 황암사에서 황석산성순국선열추모위원회 주관으로 425주년 황석산성 순국선열 추모 제향을 봉행했다.

천사령 전 함양군수

 

                                         김성기   부대표(전 함양교육장)

                                         노진환 전  서울신문사장

                                                     김경두 고문 (안의향교 전교)

                                                  장경철  고문(함양소방서장)

 

 

              양기상 아마레스링 챔피언 출신

 

박선호 역사연구가

 

김윤택 함양군의원

 

 

황태진 전 함양군의장

 

                                                        백인종 사무국장

                                                            조재일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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