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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 광환 기자
  • 승인 2024.02.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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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에서 백 억 원의 부자가 되기까지

조광환 발행인

 

 

빈손에서 백 억 원의 부자가 되기까지

 

열정은 삶의 가치를 바꿀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었다. 그것이 최선이었고, 최고가 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최선을 위해 몸이 부서지고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한 눈물겨운 인내와 노력의 결과가 최고라는 감동적인 자리로 다가왔다. 이젠 잠시 멈추어 서서 그런 내 지난 시절을 한번쯤 돌아볼 때가 된 것 같다.

 

내가 내 삶을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보겠다고 하자 아직 젊은 나이인데 무슨 자서전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용기를 내서 글을 쓰는 이유는 사회 전반적인 사정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과거보다 월등히 발전되어 있는 현시대적 사회 문화 환경적인 여건을 고려한다면 같은 고생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똑같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이 그저 단순하게 돈의 많고 적음이나 원하는 바의 성취만으로 정의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심신의 건강과 적절한 시간적 여유도 간과할 수 없는 요건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성공과 행복의 요건들이 대단히 까다롭고 복잡하다.

사람마다 행복의 가치관은 모두 다를 것이다. 삶의 우선순위도 다를 것이고 삶의 가치 기준도 다를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은 모두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각각은 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의 가치는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돌아보며 더 많이 베푸는 것이다. 얼마를 벌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어떤 정당한 노력을 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을 어떤 용도로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 얻은 돈은 단순한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돈이라는 실물로 환산된 땀이고, 열정의 산물인 것이다. 상식선에서의 돈을 충분히 갖고도 과도한 욕심을 부린다면 결국 그것은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꼴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 허망한 요물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나는 빈손에서 출발하여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흔히 말하는 백만장자의 기준인, 일반인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액수인 100억 원의 실감적 재산 가치를 형성하였다. 물론 이 재산은 어디까지나 실감적 재산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 내가 흘린 피와 땀을 돈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아니 그 이상의 자부심에서 나온 액수다. 그러니 나는 언제 어디서든 100, 아니 100억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아마도 나 같은 부자는 세상에 많고도 많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당장 내일 일도 예견하지 못한 채 오늘을 살고 있다. 내일 일은커녕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지만 그렇다고 그런 한계를 벗어날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위인이나 성인의 가르침 또는 지침서를 읽거나 인생을 조금 앞서 산 사람들의 경험을 귀담아듣는다면 한 가닥 도움으로 뼈가 되고 살이 되어 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았으니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하여, 내가 얻은 그 도움을 조금이라도 되갚는 의미로 이 글을 썼다.

 

삶이 힘겨워 지친 이들에게, 절망의 벼랑 끝에서 한숨짓는 이들에게, 미래를 향한 꿈에 부풀어 있는 이들에게 이 한 권의 책이 희망이 되어 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살아오면서 내가 통감하는 인생의 이치는 남녀노소, 성별, 학벌을 떠나 어느 누구라도 인내와 노력이라는 실천적 대가를 치른다면 희망하는 것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었다. 단지 문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경우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어느 위치에서든, 무엇을 하든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가기를, 그리하여 가슴에 품고 있는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기를 간절히 바란다.

 

글 쓰는 재주가 특출한 것도 아니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어서 처음에는 전문 작가에게 대필을 맡길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사실감이 퇴색될 것 같아서 부족한 대로 직접 써 보기로 결심했다. 없는 얘기를 창작하거나 사실을 왜곡하고 미화하여 소설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걸어왔던 지난 시간들을 사실대로만 정리하고자 했다. 그것은 내 개인적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갖는 작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삶을 반추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지침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이야기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인생을 좀 더 의미 있게 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6 년 흘러가는 시간 속 () 한둘 사무실에서

 

 

1. 어린 시절

 

 

 

나는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서 조부 신창범, 조모 강멱고, 부친 신용길, 모친 안정숙님의 31녀 중 둘째아들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두 달 전쯤인 196138(음력 124)에 태어났다. 위로는 형 신권재, 아래로는 여동생 신길숙, 남동생 신영재가 있다. 위로는 첫째로 태어난 누나가 있었고 형 아래에도 누나가 하나 있었으며 막내 동생 아래로도 동생이 하나 더 태어났는데 모두 세상과의 인연을 일찍 접었다. 우리 가족은 크게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유달리 가족애가 남다른 집안이었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내가 태어날 때 비닐 보자기 같은 걸 쓰고 나와 울지를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보자기를 걷어내고 나서야 울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그 비닐 보자기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부엌문 앞에서 나를 낳았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1996129(음력 1029) 1145분 강멱고 할머니가 87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사람 한세상 사는 것 별거 아니더라. 쉬어가며, 놀아가며, 알뜰하게 살아라.”

임종 직전 고향집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시던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가족들의 오열 속에 그렇게 개반말 선산에 계신 할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영정을 앞에 들고 상여 앞을 걸어가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과 유언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 이후로 이모부님, 이모님, 큰 고모부님, 외삼촌, 외숙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가족이 아프거나 죽으면 가장 아픈 눈물이 난다. 인연한 분들의 죽음을 전후해서는 참으로 심란한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가에서부터 삶의 무상함에 대한 갖가지 상념에 젖어 들었다.

 

내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농촌 출신 아이들이 그랬듯이 가난을 숙명으로 알고 허기진 삶을 보냈다. 쌀밥만 먹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고 죽을 많이 먹었다.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지금 가끔씩 그 죽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마도 그 가난 속에 묻힌 추억이 그리운 것일 게다. 무를 잘게 썰어 쌀과 보리를 섞어서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가난이 주는, 가난만이 줄 수 있는 한 끼의 성찬이었다.

가난이 추억일 때는 아주 짧은 한순간이고 그나마도 아주 오래전 과거 일일 때나 그렇다. 가난은 평범한 사람을 거지와 도둑으로 만들기도 한다. 가난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존재였다. 때로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게도 만들었다. 그것이 더도 아닌 덜도 아닌 바로 가난이었다.

나는 그것을 굶주림을 통해서 너무 일찍 알아 버렸다. 식사 때가 되면 밥상은 아버지와 따로 차려졌고 우리 형제들은 그 밥상에서 반찬이 남기를 고대하며 침을 삼키고 있어야 했다. 어쩌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손님상에 남겨진 김을 동전만 한 크기로 찢어서 밥을 한 숟갈씩 얹어서 먹기도 했다. 간혹 계란찜이 조금 남기도 했는데 밥을 가득 넣고 비벼 먹었다. 먹을 것에 대한 허기짐은 그렇게 항상 내 어린 시절을 초라하고 궁색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가난이 싫었다.

 

나는 장난기와 내성적인 면을 같이 갖고 있는 양면적인 성격의 어린아이였다. 가풍이 엄격한 종갓집 종손 집안의 차남으로 키워졌기 때문에 좀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내 의사 표현은 가급적 자제하는 습관이 생겼다.

 

자연 속에서 배운 여유의 미학

 

 

나는 경남 거창군 위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전교생이 1,200명이 넘었다. 그 당시엔 농촌 인구가 지금처럼 적지 않았는데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 물론 친구도 많았다. 황산 고향 마을에만 동기 친구가 40명이 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신경범 선생님으로 같은 마을에 사는 집안 어른이자 친구 신용우의 아버지셨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와도 동네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 날이면 마치 학교에 계속 남아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교실이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수업을 받았다. 오전반일 때는 아침부터 학교 갈 준비에 바빴지만 오후반일 때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오후반 수업이 있던 초등학교 2학년 여름 어느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세수를 하려고 앞마당 56m 깊이의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다가 머리를 너무 밀어 넣었던지 우물 안으로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 다행히 대청마루에서 계시던 아버지께서 바로 달려와서 나를 건져 올리셨기에 망정이지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저승길로 직행할 뻔 했었다.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심한 타박상 때문에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어 오래도록 가시질 않았다. 지나가는 여자 아이들이 귀신이라며 기겁을 해서 도망치곤 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호롱불이나 촛불을 켜거나 산에 가서 썩은 소나무에 붙은 관솔이라는 것을 가져다가 불을 붙여서 생활했다. 그나마도 아끼기 위해 밤이 되면 일찍 잠을 자야 했다. 그렇게 살다가 전기가 들어왔다.

나는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얼마나 신기했던지 밤새도록 뛰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밤이 대낮처럼 환해지는 신기함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네가 잔칫집 분위기였다.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전구를 바라보며 나는 어머니께 이런 말을 했었다.

어머이 꼭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아.’

전기가 들어온 것은 우리 동네에 문명이 들어온 것이었다. 얼마나 편하고 획기적인 문명인지. 하지만 자연은 자연대로 문명은 문명대로 그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명이 생활의 질을 높여 준다면 자연은 생활의 여유를 높여 준다. 문명의 편리를 누리면서도 자연이 주는 혜택과 여유를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런 면에서 가난이라는 굴레에도 불구하고 참 복 받은 아이였다. 자연을 스승 삼아 배운 것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햇볕 따사로운 봄날, 지게를 지고 아버지를 따라 산을 타며 나무를 하고 가끔은 송이버섯과 싸리버섯을 따기도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들녘 도랑을 돌아다녔다. 밭농사를 하지 않는 시기에는 마을 앞밭에서 자치기도 하고 정월 대보름이면 쥐불놀이를 하며 놀았다. 놀이터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산과 물과 골짜기가 모두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꼴망태를 걸머쥐고 돼지 먹일 풀을 뜯으러 다니는 것이나 산에 소 먹이러 다니는 것도 일상사였다. 어쩌다 계곡 도랑가에서 잡은 가재를 간장을 넣고 졸이면 빨간색으로 아주 맛깔스러운 요리가 되었다. 그러면 가족들과 둘러앉아 가져간 쌀로 밥을 지어 먹었다. 밥맛이 참 좋았다.

 

겨울이 오면 처마 끝에 주렁주렁 열린 고드름을 따서 먹기도 하고, 좁은 골목길에 눈이 소복이 쌓이면 대나무를 반 토막 낸 다음 앞부분을 불에 구워 구부려서 스키를 만들어 타기도 했다. 그렇게 놀다가 엿장수를 만나면 놀던 자리를 박차고 얼른 집으로 들어가 헌 고무신이나 못 쓰게 된 양은 냄비를 찾아 엿과 바꿔 먹었다.

엿장수만큼이나 반가운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한여름에 찾아오는 아이스께끼 장수였다. 어떻게든 아이스께끼를 먹어 보려고 멀쩡한 냄비를 쭈그려서 사 먹은 기억도 있다.

 

내가 나고 자란 마을에서 읍내 길까지는 비포장 자갈길이었다. 등하교 길에 이따금씩 지나치는 버스나 택시를 보면 행여 내게로 자갈이 튈까 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높은 언덕 위로 뜀박질을 하곤 했었다. 추운 겨울날엔 푹 꺼진 논두렁에 기대어 따뜻한 햇볕을 한동안 쬐다가 학교에 가기도 하고 농촌일이 별로 없는 한여름에는 수승대라고 하는 곳의 큰 냇가에 가서 하루 종일 멱을 감았다.

하교 길에는 동네 어귀의 수백 년 된 정자나무 위에 올라가 놀거나 그 아래 그늘에 누워서 시원한 시골 바람의 여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겨울철 농한기 때는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 걸 가끔 거들어 주기도 했다.

 

2005년 연말에 위천 초등학교를 방문해 보니 전교생이 채 100명도 되지 않아서 35년 남짓한 세월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농 현상이 워낙 심해 황산리 고향 마을 전체에 초등학교 입학생이 한 명도 없을 정도라고 한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썰렁했다. 내가 뛰놀던 운동장이 그렇게 작고 초라해 보일 수가 없어서.

 

 

 

 

제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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