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 발족 현장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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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성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 발족 현장취재
  • 조 광환 기자
  • 승인 2023.12.2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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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2023년 12월28일 오후6시
장소;대원숯불갈비

취재.사진 조광환 발행인

 

황석산성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 발족 현장취재

 

대하소설 지리산을 쓴 소설가 이병주. 그는 심대한 역사의 관찰자 시선으로 여러편의 역사소설을 창작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바람과 구름과 비()”. 이 대하소설은 조선말기를 배경으로 관상과 점술을 보는 최천중이 입헌군주제의 이상국가를 세우기 위해 천하의 인재호걸을 모아 삼전도장이라는 결사를 만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편, 이병주 작가는 조선시대 역사의 뒤안길을 추적하기 위해 그 현장을 답사, 르포집을 냈다. 제목은 이병주의 역사기행

이 책에 임진왜란때 장렬히 산화한 정기룡 장군이 나온다. 이병주 작가는 말한다.

임진 정유란에 수많은 장군과 애국자들을 배출했지만, 해상에서는 이순신, 육상에서는 정지룡 장군을 꼽을 수 있다. 정지룡장군은 60여전투에서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난 후에 선무공신으로 1등은 32등은 5, 3등은 10명으로 선정되었는데, 장군이 등재돼지 않았다. 조정의 공훈처리가 엉망이였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나?“

조선 역사를 뒤돌아 보면 정기룡 장군같은 애국자들이 부지기수이지만 조정은 당파 입맛에 맞는 자들만 공로를 인정했고 이름 모를 애국자들은 헌신짝처럼 처리했다.

 

곽병찬이라는 언론인이 있다. 그는 이병주작가처럼 역사의 뒤안길을 뒤돌아보기 위해 전국 각지 역사유적을 답사한다. 일전에 그 이가 황석산전투를 취재하기 위해 경남 함양군 황석산을 찾았다.

황석산전투란 1597(선조30) 924(음력 814)부터 928(음력 818)까지 안음현(安陰縣,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의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안음현 감곽준(郭逡)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가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곽준과 조종도는 전사했으며, 곽준의 두 아들인 곽이상(郭履常)과 곽이후(郭履厚)도 일본군에 살해되었다. 일본군은 황석산성을 함락시키면서 민간에도 참살을 가해 이 전투에서 희생된 인원은 수천 명에 이른다. 지금도 황석산성에는 부녀자들이 일본군을 피해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자국이 남아 있는 피바위가 전해지며, 해마다 음력 818일을 기일로 정해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실록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지며, 전투가 벌어진함양 황석산성은 현재 사적 제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박선호 역사연구가(백성의 전쟁 황석산성대첩 저자)는 말한다

 

 

곽병찬 언론인은 황석산성 전투의 실상을 이렇게 전한다.

왜군이 밀려왔다. 장석 위에서 버티던 백성(존재)들이 쓰러졌다. 존재의 두 아들도 죽었고, 딸과 며느리는 치욕을 당하기 전 자결했다. 대소헌의 부인, 유 좌수의 부인도 자결했다. 유 좌수의 두 아들은 이미 14일 북문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거창 현감 한형의 부인 이씨도 순절했다. 아녀자들은 남문 서쪽의 벼랑으로 내달았다. 그곳에서 떨어져 내린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벼랑의 거대한 바위(피바위)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여명이 틀 무렵 황석산성 나흘간의 전투는 끝났다.

당시 조선 민중들의 피해도 극심했지만, 왜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박선호 역사연구가(백성의 전쟁 황석산성대첩 저자)는 말한다.

황석산성에서 모리데루모도 우군대장이 지휘하는 육군 75,300명중 483백 명이 전사내지는 부상자가 되었고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 두 장군들이 죽음직전의 부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8개월이나 부대를 지휘를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일본군이 완벽하게 궤멸당한 전투입니다.”

 

황석산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대단하다. 박선호 역사연구가에 따르면,“ 황석산성을 공격한 모리대루모도의 우군은 전주성에서 북진하여 조명연합군의 전라도로의 진입을 차단하여 남쪽 4도를 분할해야 하는데 황석산성에서 너무나 큰 피해를 당하여 북진을 하지 못하고 남원성을 공격한 죄군이 북진을 함으로서 좌군이 전주성을 입성하는 820일부터 우기다히데이에이가 북진 후 전라도로 돌아오다가 전북정읍에서 2차재편성을 하는 816일까지는 거의 한 달간이나 전라도는 일본군이 없는 군사적 무주공간이 되었는데 이 순간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명량대첩을 준비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모리데루모도가 황석산성에서 816일 부상을 당한 후 북진을 위한 전주성의 재편성에서부터 지상군 총대장이 된 우기다히데이에가 전남고흥에 도착하는 919일까지 명량대첩에 대한 상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박선호 역사연구가는 황석산성 전투는 조선팔도 분할과 7년 임진대전쟁을 종식시킨 전투라며 대첩비세우기를 주장한다.

 

 

이렇듯 황석산성 전투는 이순신 장군의 노량 명량 한산 전투 버금가는 역사적 의미가 큰 전투이건만, 제대로 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미들이 조명되지 않고 있다.

 

황석산성전투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역화 , 학술심포지엄, 유적 정비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황석산성 성역화 추진위원회가 1228일 발족됐다.

추진위원회 측은 우리 민족의 국가 수호정신이 깃들어 있는, 황석산성전투 그 의미를 뒤돌아 보고자 추진위원회를 발족한다, 추진위원회는 황석산성 성역화를 통해 그동안 묻혔던 황석산성 전투의 진실을 알리고 황석산성 전투를 재조명하여 유명을 달리한 7천여 혼들을 위로하고 성역화 작업후에 많은 국민들이 역사현장을 추모할 수 있게 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황석산성 성역화 추진위원회 대표는 천사령 전 함양군수가 맡는다. 부대표는 김성기 전 함양군교육장, 임지택 전 안의중학교 교장 등이다. 고문으로는 김경두 안의향교 전교, 김윤세 인산죽염 회장, 노진환 전 서울신문 사장, 박선호 황석산성 연구소장, 오일창 전 함양군교육장, 유성기 경영학박사, 이동원 전 안의중교장, 자문으로는 김윤택, 양인호, 정광석 함양군의원 사무국장  백인종 교육학박사.사무차장  이영철 서부경남 신문 사무차장 전인배   전 농협 조합장 . 홍보국장  양기상 함양 씨름  협회장.홍보차장 김영환 문화해설사. 홍보차장 박유미  용추아트밸리 .홍보차장  박진규 함양사진협회 . 감사 신용준 안의면  이장협회 회장.감사  오복식  대학 교수

추진위원회 홍보를 맡은 양기상 전 함양군 씨름협회장은 황석산성 전투의 역사적 사실을 정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을 통한 역사적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황석산성 전투는 나라의 지시나 명령이 아닌 내 가족,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민들이 목숨을 내걸고 항거했다. 이 사실을 전 국민들에게 알리면 교육적으로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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