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함양시장 길건너, 녹지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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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함양시장 길건너, 녹지이발소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0.01.1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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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함양시장 길 건너 녹지이발소가 있다. 파랑 빨강 하양의 3색 이발소 표지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돌아가고 있다. 붉은 페인트로 이발소라고 적힌 좁은 문을 밀고 들어서면 연탄난로 연통을 고정시킨 철사줄에는 빨간 체크무늬 수건들이 허연 김을 뿜으며 내걸려 있다. 난로 한 편에서는 면도용 비누 거품이 끓고 있다. 이발소에는 푹신한 이발의자가 세 개 있다. 제대로 닦지 않아 뿌연 대형 유리거울 옆에는 이용사 면허증을 넣은 액자, 위쪽에는 안의새마을금고 달력이 붙어져 있다. 바리깡 가위 면도기 등 이발기구와 염색약 포마드 크림들도 가지런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인 오성두(76)씨. 1970년 이 자리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글|김석종 경향신문 상무이사

 

 

 

이발소풍경

맨날 흙탕 먼지 속을 싸질러다니고도 한달씩 감지 않아 이가 기어다녀도 머리는 잘도 길었다. 부스스한 까치머리를 참빗으로 훑어내면 서캐가 하얗게 쏟아졌다. 궁벽한 농촌 마을에는 간판을 내건 이발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 마당에 통걸상 하나만 달랑 내놓고 머리를 깎아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졸고 있으면, 이발사 아저씨는 의자 주위를 맴돌면서 열심히 *바리깡을 놀렸다. 그러나 바리깡은 대부분 날이 제대로 서지 않았거나 양날의 이가 잘 맞지 않아 머리털을 통째로 집어내는 통에 눈물이 핑돌았다. 깎은 머리에도 층이 지거나 바리깡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기 일쑤였다.기계하나로 여러 사람의 머리를 깎고 제대로 소독도 하지 않다 보니 아이들이 *기계충에 걸리는 일도 많았다. 당시 인기만화의 주인공인 '꺼벙이'의 까치집 헤어스타일은 기계충 땜통 자국이 흔했던 그 시절 아이들의 머리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의자 한쪽에 매달린 가죽혁대에 *면도칼을 쓱싹쓱싹 갈아 파랗게 날을 세우는 이발사의 솜씨에 매료되곤 했다. 동네 이발사 아저씨는 아이들을 참 잘 어르고 달랬다. 머리를 깎지 않으려고 떼를 쓰던 아이도 의자에 앉기만 하면 얌전하고 착한 아이가 됐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학교 구내 이발소나 읍내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면소재지 삼거리 명동라사 행복사진관 제일전파사 우정*마크사를 지나서 희망다방 옆 골목으로 꺾어들면 파랑 빨강 하양의 3*이발소 표지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돌아가고 있었다.

붉은 페인트로 '이발소''이용원'이라고 적힌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서면 연탄난로 연통을 고정시킨 철사줄에는 빨간 체크무늬 수건들이 허연 김을 뿜으며 내걸려 있었다. 난로 한 편에서는 면도용 비누 거품이 끓었다.

이발소에는 푹신한 이발의자가 세 개쯤 있었다. 제대로 닦지 않아 뿌연 대형 유리거울 옆에는 이용사 면허증을 넣은 액자, 위쪽에는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 물레방아 도는 풍경화 같은 '이발소 그림'과 푸슈킨의 시를 수놓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바리깡 가위 면도기 등 이발기구와 염색약 포마드 크림들도 가지런히 제자리를 지켰다.

자신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흥이 나면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반복해서 부르던 김씨, 술독이 오른 딸기코와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깎다가 늦배부른 아내에게 이발소를 맡기고 술집으로 도망치던 주정뱅이 최씨, 짝사랑하던 태양다방 미스리를 중앙목재소 박사장에게 빼앗기고 면도칼을 접었다 폈다 하며 씩씩대던 박씨 같은 이들이 이발소를 지켰다.

이발소에 가면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 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차례가 왔다. 아이들이 '주간경향'이나 '선데이서울' 같은 묵은 주간지를 뒤적여 연예인들의 야한 포즈를 보는 곳도 이발소였다. 어른들은 느긋하게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염색을 했다. 꼬마들은 이발의자의 팔걸이에 걸쳐놓은 빨래판에 앉혀져 머리를 깎았다.

이발사는 보드랍지만 때가 타서 누런 나일론천에 집게를 물려 씌워놓고 바리깡질을 시작했다. 바리깡의 사각대는 장단과 의자의 편안함 때문인지 금세 졸음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런 아늑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발기계가 머리털을 한 움큼 아프게 쥐어뜯는 통에 '아얏'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쳐들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시 구절이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머리카락은 가을에 흐르는 물빛처럼 맑고 원만하게 차야 한다. 그렇지 않고 찌그러진 곳이 있다면(頭髮如秋水圓還缺) 처자가 극하여 노년에 한가하지 못하게 된다(妻子克刑子老不閑)”…김세일의 『相法大典』에서 인용.

 

상고머리를 깎을 때는 머리 아랫부분을 밤톨처럼 까칠까칠 밀어낸 뒤 한손에는 가위를, 또 한손에는 커트용 쇠빗을 들고 째깍대며 모양을 만들어나갔다. 머리를 감기는 일은 이발사의 아내나 이발 기술을 배우는 '시다'의 몫이었다. 세면대에 머리를 처박으면 물뿌리개(조로)로 물을 부으면서 누런 빨랫비누로 까까머리를 박박 씻어줬다. 머리를 헹군 뒤 머리카락 층이 잘 보이게 분칠을 해 가위로 다듬고 면도를 하면 이발은 끝났다. 조그맣게 오려낸 신문지를 어깨에 올려놓고 면도칼을 닦아내며 면도를 했다. 솔로 비누거품을 내 면도를 하다가 베어서 피가 나는 일도 허다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이발소에 여자 면도사를 두어야 장사가 됐던 것 같다. 이발소에 가면 어른들이 귀밑머리 뽀송한 계집애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안마를 해주는 집도 있었다. 면도사 아가씨의 달콤한 분냄새와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가슴 때문에 얼굴이 벌개지고 숨이 막혔다.

학교에서는 두발검사가 엄격했다.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독사' 학생주임 선생님의 무자비한 바리깡에 머리 위에 고속도로가 나거나 열십자가 새겨졌다. 깎인 머리를 면도칼로 싹싹 밀어 배코를 치고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길에서는 경찰이 가위를 들고 장발을 단속하던 시절이었다. 논산훈련소 앞의 허름한 이발소에서 머리를 빡빡 밀던 추억은 남자들이 안주삼아 떠드는 '군대 이야기'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시절 아늑한 공간이면서 고역의 자리이기도 했던 이발소. 바리깡에 밀려 한 움큼씩 잘려나가던 머리카락. 염색약과 포마드 냄새 가득했던 옛날의 이발소는 이제 비누거품처럼 사라져 추억의 한토막이 되었다.

김석종 기자sjkim@kyunghyang.com

 

*그시절 이런말 저런말

*바리깡 프랑스 제조회사 이름인 바리캉 에 마르에서 유래한 클립퍼. 처음에는 나무 손잡이가 달린 양손 바리깡이었다가 한손 바리깡을 거쳐 전기 바리깡이 나왔다.

*기계충 두부백선. 전염성이 매우 강한 곰팡이균 질환. 둥그런 각질이 두피에 생겨 진물이 흐르면서 점점 넓어졌다. 이발기계로 전염되기 때문에 기계충으로 불렸다. 기계충자국이 많은 아이들을 땜통이라고 놀렸다.

*면도칼 자루가 달려 접었다 폈다 하는 이발소 전용 면도기. 개인용 면도기가 보급되기 전에는 이발소에 가야 면도를 할 수 있었다. 쓸 때마다 가죽에 갈아서 날을 세웠지만 수염을 깎다가 얼굴을 베기 일쑤였다.

*마크사 복장(服裝)가게. 군인들의 계급장, 학생들의 명찰, 교표, 휘장, 상패 등을 만들어 팔았다.

*이발소 표지 빨강 파랑 하얀색으로 된 3색 표시등. 영업중에는 전기를 꽂아 회전하도록 되어있다.

*포마드 70년대 멋쟁이 신사들이 발랐던 머리 기름. 상품명인 태평양화장품의 ‘ABC포마드를 그렇게 불렀다. 남성 화장품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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