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함양군 수동면 상백 출신 지공 스님 행장기

2019-12-27     지리산힐링신문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
대승불교의 꽃은 보살(菩薩)이다. 보살은 보디사트바의 음차인 보리살타의 준말이다. 임연태 불교학자의 말에 따르면, “보살은 정각(正覺)을 얻기 이전의 석가모니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대승불교로 접어들면서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를 추구하는 모든 수행자를 보살이라 한다.”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금강경에 수록되어 있는 글로써 풀이하면, “자기 자신만이 불도를 이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불도를 성취하자고 하는 것이다.


상구보리하회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란 말 속에 보살의 존재 이유가 있다.
상구보리하회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중생제도를 강조하면서 등장한 대승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 즉,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타인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정신을 표현한 말이다.
, 보살이 위로는 자신을 위해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깨닫지 못한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보살의 원래적 표현인 보리살타의 의미로도 파악될 수 있다. 한편, 남을 위해 좋은 일,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스님, 불자를 우리는 보살이라고 부른다.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에 금동지장사(010-8508-6357)가 있다. 이 절에 지공(智空) 스님이 주석한다. 스님은 오직 마음 하나 확실하게 닦겠다고 일치감치 산중(山中)으로 출가, 득도한 선승이다. 스님은 젊은 시절 길 없는 길에서 죽을 각오로 치열하게 무소의 뿔처럼 고독하게 수행했다. 몇 년씩 외딴 토굴에 들어가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 가시밭길 수행에서 스님은 무엇을 얻었나?

 

지공 스님은, 현재 부산 금동지장사 주지로 주석하면서, 법무부 부산교도소 교정협의회 부회장 교정위원, 영남매일 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동국대학교 제55기 사회과학대학원 총학생회장,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석박사 총동창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몽골에서 의학박사(대체의학), 교육학박사, 사회복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멀고 먼 대장정의 길

 

 

 

지공스님은 청년시절, 법보대찰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해인사 선방에서 한 마음을 내 용맹정진한 후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또다시 걸망을 지고 만행에 나섰는데 그, 멀고도 아득한 깨달음, ‘길 없는 길(無路之路)’은 부처님께서 득도한 네팔 룸비니 동산, 네팔 카르만두, 중국 구화산, 캄보디아 등 15여년 만행실로 멀고 먼 대장정의 길이었다.
네팔 룸비니. 불교 전설에 따르면 여기서 마야 왕비가 사라수 가지를 잡고 서 있는 동안 장차 붓다가 될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룸비니동산 지척에 부처님의 근본 8탑 중의 한 곳인 람그람사리탑이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사리를 8곳으로 나누어 모시게 되는데, 이곳은 부처님의 외가에 해당하는 콜리야족이 세운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이다. 그 후 200년이 지나서 아쇼카왕이 8곳 부처님의 사리탑을 열어 사리를 전 세계 84000곳의 사리탑으로 나눠 모시고자 한다. 하지만 이 곳의 탑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탑을 지키던 용왕이 아쇼카의 꿈에 부처님을 나 보다 더 잘 모실 수 있을 자신이 있으면 사리탑을 열고, 그렇지 않으면 열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 결국 아쇼카왕은 사리탑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초기 사리탑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유적지를 참배하고 사리를 참배하는 일은 새롭게 정진하고자 하는 수행자들의 귀한 마음이다.

중국 구화산(九華山). 상하이에서 차를 타고 6시간 정도 가면 안후이성 구화산이 있다. 이 산 속에 등신불이 된 신라 왕자가 있다. 김동리 소설에 나오는 바로 그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한편 구화산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이란 불교의 대승보살의 하나로 석가모니가 죽은 후 미륵이 출생하기 전 까지 부처가 없는 세계에서 살며 극락, 인간, 지옥의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지공 스님은 네팔 룸비니, 중국 구화산 등지에서 면벽수련하며 한소식(靈通)’ 하기 위해 용맹정진했다.

 

 

 

만덕동 금동지장사의 풍수 형국

 

 

필자는 지공스님의 선 수련기와 도력을 취재하기 위해 모년모월모일 부산 북구 만덕동 금동지장사를 찾았다.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은 백두대간 금정산맥의 정기가 용솟음치는 곳으로 이름 나 있다.
금정산맥은 부산광역시의 척량 산맥(脊梁山脈)으로 낙동강의 동쪽 하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의 원효산에서 시작하여 부산광역시의 금정산~백양산~엄광산~구덕산~시약산~승학산 등으로 이어지다가 다대포의 몰운대에서 대한 해협으로 몰입한다.
금정산맥은 기본적으로 양산 단층 운동에 의해 생성된 산지로서 북동쪽이 남서쪽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융기되어 있어, 북동 사면은 대체로 급경사이고 남서 사면은 비교적 완만한 경동 지형(傾動地形)을 나타내고 있다.
금정산맥의 지명은 봉우리 중 가장 고도가 높은 금정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금정산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산정에 바위가 있어 높이가 3장 가량이다. 그 위에 우물이 있는데 둘레가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우물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빛 우물(金井)이라 하였고, 산 이름이 금정산(金井山)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은 금빛 우물인 금샘(金井)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금정산맥 자락에 산성 고개(고도 390m이며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과 금정구 금성동을 연결), 만덕 고개 (고도 290m이며 구포와 동래를 연결), 불태령 (고도 284m로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만덕동과 성지곡을 연결), 구덕 고개 (고도 220m로 부산광역시 서구 대신동에서 사상을 연결), 대치 고개 (고도 130m로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과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을 연결) 등의 여러 고개들이 있다.
금동지장사는 백두대간의 마지막 종착지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백두대간이 힘차게 남으로 뻗어내려 오다가 금정산이라는 큰 지기(地氣)의 저장고를 만든 뒤 여기서 또 한번 막강한 지기를 생산해 낸다. 이 기()를 최초로 받는 곳이 바로 금동지장사이다.
풍수전문용어로 말하면 금동지장사는 과협처(過峽處)’에 터를 잡고 있다. 과협처를 쉽게 풀이 해 보자. 백두산은 태조(太祖), 설악산은 고조(高祖), 금정산은 증조(曾祖)이다.
백두산 천지서 분출한 수 조() 마력의 에너지가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마침내 금정산으로 이어진다. 그 정기가 마무리하는 곳이 이른바 금동지장사 터다. 금동지장사는 부산 만덕동 언덕,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에 자리 잡고 있다.

 

 

, 절 이름 앞에 금동이라고 지었을까? 금동지장사 공양주보살에 따르면 우리나라만 옥황상제를 전설의 고향 주인공 쯤으로 생각하는 데, 아닙니다. 옥황상제는 천지만물을 주재하고 있습니다. 옥황상제의 좌우에는 금동옥녀(金童玉女)가 서 있습니다. 이 옥녀가 사바세계 아픈 이의 영육을 어루만져 주죠. 금동지장사에 그 금동옥녀가 출현하여 아픈 이를 치유케 해 준다는 의미에서 금동지장사라 부릅니다"

 

 

지공스님을 친견하다

 

 

 

 

 

若歸依 能消滅地獄苦(약귀의 능소멸지옥고: 처사. 삼보에 귀의하시게 그러면 능히 지옥의 고가 성불 할걸세)성불하십시오. 소승의 세속 때 이야기 들어서 뭐하게. 부처님 전에 왔으면 성불할 생각을 해야지?”
큰스님 하고 절을 올리자 곧장 핀잔이 날아왔다. 말씀은 그렇게 해도 나그네를 맞아주는 미소가 따뜻하다.

스님이 주석하는 곳에 달마도(達磨圖)가 붙어져 있다.

 지공스님이 그렸습니까?” 물으니 고개만 끄덕인다.
거칠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감필법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남송대의 선승화가들에 의해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일본에서 크게 풍미하였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널리 파급되었으나 조선 중기 김명국의 달마도가 현존작으로는 가장 유명하다.

 


지공 스님은 수도자로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수행을 하면서도 세속을 초월한 고상한 취미를 선화(禪畵)에 담아낼 줄 아는 그런 분이다,
스님은 종종 달마 그림을 그려 불자에게 선물한다고 한다. 현재 부산 불자들 사이에서는 지공 스님 달마 그림덕분에 많은 불자들이 개운(공무원 판검사 배출, 환자 심신쾌차)을 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달마 그림. 일종의 부적이지요. 부적 아무나 그린다고 효험이 있나. 아니지. 부적을 만들 때 택일 잘한 후. 목욕재계하고 동쪽을 향해 정수를 올리고 분향하고 절차가 복잡하잖소. 달마그림도 마찬가지 부처님 전에 예불을 올리고 기()를 모아 그려야 효험이 있소이다

 


달마도 그림을 소지하면 무병장수, 행운이 따른다는, 이런 미확인의 믿음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스님이 달마도의 부적효과에 대해 말씀하신다.


달마도는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로 알려진 달마(達磨, 보디다르마, 菩提達磨) 대사를 그린 그림이지요. 달마는 남인도(일설에는 페르시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대승불교의 승려가 된 인물인데요.
서기 520년경 중국에 들어가 9년간 면벽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후 선종을 창시했고, 소림사(小林寺)에서 참선을 해 소림권법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달마는 불교계에서 깨달음과 선()의 세계, 선무도(禪武道)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지요.
달마가 신격화한 것은 그의 삶에 얽힌 설화와 관련 있소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의 부덕과 오만을 질타하다 죽임을 당한 달마가 관 속에서 부활해 신발 한 짝만 남기고 서쪽으로 떠나갔다(西天行)는 이야기, 그리고 서천행을 하는 달마를 군사들이 쫓아가자 갈대 잎을 꺾어 타고 강물을 건넜다는 전설이 그것 아닌가요?”

 


동아일보 기자의 리포트에 따르면 불교의 스승이자 대선사인 달마가 우리나라에서 귀신을 쫓는 퇴마사도사의 이미지로 굳은 데에는 소림사의 역할이 컸다. 소림사가 주무대인 홍콩 무협영화, 만화, 무협지를 보고 자란 세대의 머리 속엔 달마대사가 무술의 달인이자 신적 존재로 주춧돌처럼 박혀 있다. 영화, 만화, 무협지에 표현된 달마는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고, 강 위를 뛰어 다니며, 연기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온갖 귀신을 혼자 쫓아내는 달마대사는 일반인에겐 신() 그 자체이다. 영화,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절대공력을 가진 스님이 대부분 달마의 형상을 지닌 것도 그 때문이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 긴 수염에 펄럭이는 장삼. 달마는 불자들에게 복을 불러주고 장수를 불러주는 수호신 그 자체인 것이다.”

지공 스님이 달마도의 효험에 대해 설명하신다.
달마도의 가치는 그 필법이나 구성이 무심(無心)’ ‘자유’ ‘절대 공()’과 같은 선()의 세계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구도의 수단으로 달마도를 그려야 달마도에서 막강한 파워가 분출한다는 게 소승이 생각입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 탄, 달마

 

 

 


여느 화가들이 그린 달마도는 대개 달마 인체 윗 부분(상체)만 그리고 있는데, 지공스님의 그림은 호랑이를 길들이는 달마, 호랑이를 타고 질주는 달마, 유체이탈((留體離脫)을 하는 달마를 그려 눈길을 끈다.

지공스님의 말씀이다.
달마선사께서는 유체이탈을 하셨지요. 달마 선사께서 중국에 건너 온 후 양자강을 조금 남겨두고 산길을 걸을 때 였습니다. 산길에 엄청나게 큰 이무기가 한 마리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길로 다니지 못하고 먼 길로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달마대사께서는 먼 길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하겠느냐고 생각하시면서 또 '이무기가 썩어서 냄새를 피운다면 길을 오가는 중생들이 괴로움을 당하겠다.’ 하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는 유체이탈이라는 신통력을 써서 이무기의 시체를 양자강 깊은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 육체를 벗어서 그 자리에 놓아두고 이무기 몸속으로 들어가서 죽은 이무기를 양자강 깊은 곳에 옮기신 것입니다.”

-호랑이를 길들이고 호랑이 등을 타고 질주하는 달마그림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心裏無瞋能馴虎. 심리무진능진호

마음 속에 화가 없으면  호랑이를 길들일 수 있소.”
慈室忍衣平天下. 자실인의평천하
자비의 방에서 인욕의 옷을 입으면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소.
慈忍三昧平天下. 자인삼매평천하
자애심과 인욕바라밀로 천하를 평화롭게 하오이다.

 


지공 스님의 전신 달마도에 달마 선사 지팡이에 짚신 한 짝이 걸려 있다. 이에 대한 스님의 해설이다.
, 짚신이 한 짝만 걸려 있느냐? 달마선사께서는 당시 불교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소이다. 그래서 (달마를 저격하려는 이들이) 다섯 번이나 음식에 독을 넣어 달마를 죽이려 했지만, 그때마다 달마는 독을 모두 토해 버렸습니다.
그때 달마에게는 혜가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달마가 혜가에게 이제는 (저승으로) 가도 되겠다, 말씀하시며 6번째로 독을 넣은 음식을 잡수셨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무덤에 짚신을 넣어주라, 3년 후에 고향으로 가겠다!“

달마대사가 입멸하시고 3년이 지난 뒤에 중국의 사신 송운이 인도의 어느 나라를 다녀오다가 촉룡 고개에서 달마대사를 만났습니다. 평소에 달마대사를 잘 아는 송운은 대사님 어디를 가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달마대사는 고향으로 갑니다, 라 말하고 임금이 돌아가셨으니 빨리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송운이 급히 돌아왔더니 황제가 이미 붕어한 후였습니다.
송운은 이야기를 새 황제에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새 황제는 이 이야기를 듣고 기이하다고 생각해서 대사의 무덤을 파 보도록 했답니다. 무덤 안에는 신발 한 짝만 있을 뿐 시신은 온데 간데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발 한 짝을 벗어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신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달마도를 자세하게 보면 위 눈꺼풀이 없다. 두 눈을 부릅 뜨고 눈꺼풀도 없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허허, 용맹정진하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졸음으로 위의 눈꺼풀이 자꾸 내려오는 거라, 달마대사는 졸음을 이기기 위해 아예 위 눈꺼풀을 잘라 버렸소. 그로 인해 달마의 얼굴은 눈이 유난히 부리부리하고 섬뜩해 보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요. 그리고 잘라낸 눈꺼풀을 앞 뜰에 버렸는데 시간이 지나고 그 자리에 묘한 나무 한그루가 생겨났다는 것이라! 이 나무가 우리가 지금 즐겨 마시는 차나무의 시초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지요. 이러한 전설은 불가에서 도를 깨치려는 수행자들이 달마도를 거는 이유 중에 하나도 달마의 강한 의지를 배우기 위한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오이다.”

 

한편, 소림무술의 창시자가 달마대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달마대사께서 숭산 소림사에서 면벽 수행을 하면서 너무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아 몸이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물들의 동작을 보고 같이 따라 하셨다는 것이다. “이 동작들이 소림사 무술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뱀의 움직임을 본 뜬 것이 사권(蛇拳)이오이다. 그리고 사마귀가 먹이를 잡는 동작을 따라 하신 것이 당랑권이 됐고, 학의 고고한 움직임을 본 뜬 학권이 되었고, 호랑이가 먹이를 잡아채는 동작을 본 뜬 호권, 원숭이의 움직임을 본 뜬 원권 등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지요.”

 


소림사의 무공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근경(易筋經)’세수경(洗髓經)’인데 이것도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 그 외에도 달마대사의 초상화인 달마도는 귀신을 쫓아내는 신통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수맥을 차단하는 힘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말로 달마도가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있는지? 수맥을 차단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덕 높으신 스님들이 그리신 달마도에서는 기가 발산하는 것은 확실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