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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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19.12.2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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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범




전 국회의원

 

어릴적 지게지고 나무하러 다녔던 산 속 양지바른 등성이에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묘소가 있습니다. 설 연휴에 묘소에서 나의 뿌리를 되새깁니다.

할아버지는 1899년에 태어나 제가 중학생때인 1979년에 세상을 떠나시니 조선말 고종 임금에서 박정희 대통령 말년까지, 말 그대로 한국 근현대사를 몸으로 사셨습니다.일제시절 일본 섬의 어느 탄광 (생전에 '아오모리'라고 말씀 하신 기억이 있습니다)에서 일하신 것 빼고는 이 산간벽촌에서 살다가 여기 묻혔습니다.

동래 정씨 할머님은 1907년에 나셔서 제가 한창 기자생활 하던 1997년에 졸하시니 장수의 복을 누리셨습니다.

인접한 큰 동네, 위천면 사마리(서마리라고도 함)에서 이 산골로 시집올 때 신랑은 8살 많은 23세였다고 합니다"내가 열다섯살때 신씨집안으로 시집와서 평생 이렇게 산다."고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정규교육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된 인격자였습니다.조부님은 하루종일 논과 밭,산에서 일만 하시는 과묵한 분이셨습니다.그러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발 벗고 도와주고 신의가 깊어 일만 생기면 동네사람들이 찾아와서 조언을 구하고 상의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돌아가실 때 까지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갓을 쓰셨는데 얼마나 위엄이 있었는지 장터에 나가면 모두 다시 쳐다보면서 저분이 누구냐고 수군댈 정도였습니다. 어린 제가 보아도 할아버지는 대단하고 자랑스러웠는데 제 눈에는 수염이 특히 멋졌습니다.

 

 

 

삼국지 영화에서 관우의 수염을 보면서 할아버지의 멋진 풍모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할머님은 어질 인, 인자함 자체였습니다.

"공을 들인다." 할머니는 항상 공을 들이고 비셨습니다.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빌고 절에 가서 빌고

삼신할미한테 빌고.

가족, 자식, 손자들을 위해 평생을 비셨습니다.

마음을 모아 정성을 다해 비원하는 삶이었습니다.

할머님한테 도움받은 분들이 참 많으신데 제가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의 음덕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가운데 하나-

6.25전쟁때 이 산간지역은 북한 인민군 치하였는데 인민군에 끌려간 모녀를

할머니가 구출해서 20리 눈길을 업고 걸어서 면 소재지 집에까지

데려다줬다는 이야기를, 당시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분의 가족한테서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조부모님은 4남2녀를 두셨는데 장남이 바로 제 부친입니다.

아버님은 1931년에 나시어 제가 방황 끝에 기자로 취직했던 그 해,

1990년에 돌아가시니 우리 나이 환갑때입니다.

아버지는 참 불운하셨습니다.

젊은시절 한때는 (민주공화당 시절) 정치에 관여하시기도 했는데

"너희 아부지,참 똑똑하고 대단한 분인데 운이 안따라줬다."는 게

아버지를 아시는 분들의 한결같은 아쉬움입니다.

아버님은 어려서 익힌 한문실력이 대단하셨는데 글을 잘 지으셨고

특히 한문글씨는 웬만한 서예가 수준이셨습니다.

 

그러나 꿈이 커셨던 만큼 좌절감도 컸던 탓인지

말년에 술로 인한 간경화로

당신의 어머니보다 일찍

돌아가신 한을 남기셨습니다.

어머님은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청주경씨 집안이신데

친정 아버지,곧 저의 외조부는

서당훈장과 향교 전교까지 지낸

지낸 한학자이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 아버님을 눈여겨보고

큰 딸을 시집보낸 것이

제 부모님과 저의

인연인 셈입니다.

어머님은

1932년에 나셔서

제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있던

200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은 무엇보다

관대하셨습니다.

"너희 어무이는 참

속이 너른 분이셨다."

아시는 분들이 기억하는

우리 어머님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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