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후보 해인사 방장큰스님을 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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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후보 해인사 방장큰스님을 친견하다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0.04.03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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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해인사=조광환 기자

해인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그 밖에 주요 문화재로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도 있다.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어 많은 학인(學人)들로 붐빈다. 말사(末寺)는 150여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藥水庵)·원당암 등이 있다.

해인사 원각 방장스님은 누구?

 

원각 대종사는 1947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966년 해인사 중봉암에서 출가해 1967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혜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와 구족계를 받았다.

수계 후에는 성철, 전강, 경봉, 구산 스님 밑에서 공부했으며 해인사 송광사 상원사 범어사에서 수행정진했다.

거창 고견사 주지, 원당암 감원 소임, 달마선원 선원장, 해인사 유나 소임,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15년 3월 해인총림 9대 방장으로 추대되면서 법보종찰 해인사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해왔다.

원각 대종사는 도림봉철 스님의 '착한 것도 내려놓고 악한 것도 내려놓고 본래 마음자리에서 살아라'라는 말을 듣고 발심출가했다. 육조 혜능 선사의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화두가 출가의 동기였던 셈이다.

방장 취임식 때는 "독좌 대웅봉(獨坐 大雄峰)할 수행자라야 천상천하 유아독존하여 비로정상을 활보할 수 있다"며 "만냥의 황금도 다투면 부족함이요, 서푼 황금이라도 양보하면 남음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를 남겼다.

선방수행을 강조한 스님은 하안거 때는 "평소 세월이 번개처럼 빠르니 시간을 어찌 아끼지 않을손가.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리오"라는 결제법어로 용맹정진을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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