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함양 황석산성전투 심층연구한, 화제의 인물 박선호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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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함양 황석산성전투 심층연구한, 화제의 인물 박선호 역사학자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2.06.1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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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양기상 전 함양군씨름협회 회장
박선호 소장, 주요저서로는 ,황삭산성전투ㅘ 임진대전쟁> 이 있다 

 

 

 

정유재란(丁酉再亂)15978, 도요토미 정권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12월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일본에서는 당시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의 연호를 따서 게이초 전쟁(慶長けいちょうのえき 게이초노에키)이라고 한다.

초기에는 일본군의 공세가 이루어지다가, 명량 해전(鳴梁海戰)을 변곡점으로 남해안의 왜성(倭城)들에 틀어박힌 일본군에 대한 조명(朝明)연합군의 공격 양상을 띠었다.

때문에 정유재란 때 조선군은 대부분 공격측, 일본군은 대부분 방어측에 서게 되었고, 명량 해전과 노량 해전을 제외하면 조선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둔 전투는 거의 없는 교착전쟁의 모습을 나타냈다.

1597년 음력 816일 일본군들이 경남 안음현과 거창현, 함양군 등 7개 군현에 쳐들어왔다. 1597(선조 30) 816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적의 맹장들은 안음현 황석산성(지금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소재)에 도착, 수만의 군사로 성을 공략하였다.

 

영화 명량 

 

 

황석산성
황석산성 

 

당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황석산성이 호남과 영남의 길목이므로 일본군이 반드시 차지하려는 곳이라 여기고, 주위의 군사를 예속시켜 안음현감 곽준(郭䞭)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적군이 공격해 오자 곽준은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며 성을 보수하는 등 전력을 다하였다.성 안에는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 등이 백성들과 합세해 성을 지킬 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적들은 성을 포위해 가토는 남쪽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서쪽에서, 구로다는 동쪽에서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성 안에서는 곽준·조종도를 비롯한 장수들과 백성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백사림은 가족을 성밖으로 피신시킨 뒤 성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곽준은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와 함께 끝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고전 끝에 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성안을 수색하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뒤이어 일본군은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진안현을 거쳐 전주로 빠져 좌군과 합친 뒤 전주성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투는 비록 패하여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으나, 적으로부터 성을 지키고자 하는 백성들의 정신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황석산성 일러스트 

 

 

여기 한권의 책이 있다. <잃어버린 역사, 백성의전쟁, 황석산성 대첩 (정유전쟁)>

이 책은 1597814일부터 818일까지 치열한 혈전으로 왜군 75300명과 대치한 조선 수비군이 모두 순국한 우리 전쟁사의 초유 산건 황석산성 전투와 임진대전쟁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주요 목차로는 1. 황석산성 전투 2. 황석산성전투 전후의 관련전투 3. 한반도에 만든 왜성과 천주교 신부 세스베데스의 편지 4.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5. 황석산성전투 관련 묘비와 기록 등이다. 지은이는 역사연구가 박선호 황석산성연구소장. 경남 함양군 안의면 귀곡마을 출신으로서 한국방송대 행정학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연구하고 군사학 학사과정, 육군대학 과정을 이수했다. 전 새마을중앙연수원교수를 역임했다.

 

신동호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 책은 그간 잊어지고 마모되고 변형되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 황석산성 전투의 진실에 처음으로 본격 접근한 저자의 노작이다. 20여년 동안 각종 사료를 섭렵하고 현장을 답사해 얻은 자료에다 군사전문가로서의 이론과 경험을 점복해 황석산성 전투의 전개과정 뿐 아니라 그것의 임진전쟁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평가가 어떻게 변형 왜곡됐는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김장실 전 국회의원은 “425년 전, 정유재란의 전화가 이 땅에 휩쓸 때, 경남함양의 황석산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으니 이름하여 황석산성전투이다. 그 전투의 승리가 7년전쟁을 종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처음으로 밝힌 책이다. 이 책은 왜곡된 식민사관에 의해 퍠전의 역사로 치부되던 전투를 사실에 입각, 새로이 해석한 역작이다라고 말했다.

 

좌측인물이 필자 양기상 

 

 

 

 

611일 토요일, 필자는 구본갑 여행작가와 함께 저자 박선호 황석산성연구소장을 만나, 그의 책을 주제로 환담을 나눴다.

인터뷰 장소는 서하면 서하 촌두부집. 우리는 돼지껍데기와 모두부를 안주삼아 함양막걸리를 주거니받거니 하며 대화를 나눴다.

 

구본갑 여행작가= 곽병찬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이 박선호 소장님의 역작,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대첩 정유재란>을 아주 높이 평가를 하더군요. 곽병찬 논설위원이 쓴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황석산성 백성의전투>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버린 전장(황석산성)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이름없이 스러져간 수천명의 백성들, 그 잊혀진 충혼을 우리 후손들은 길이 기려야할 것이다. 황석산성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영혼들의 그때 행각들을 책으로 옮긴 박선호 소장의 노력, 정말 대단하다.“

저도 (구본갑) 선생님 책을 여러번 읽고 이 책 정말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 책속에, 풍부한 사료, 현장답사, 정확한 역사적 사실고찰 등을 담겨져 있더군요.“

박선호 소장=허허 과찬의 말씀입니다.

양기상=소장님께서는 왜 황석산성 전투를 대첩(大捷)이라고 명명하셨는지요?

황석산성 전투는 1597816일 하룻밤 전투가 아니라 백사림, 곽준, 조종도, 유명개 조선병사와 7000여명의 백성들이 근 5일동안 왜군과 싸운 전투였습니다.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조선인이 몰살하고 왜군은 한명도 죽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건 틀린 말입니다.

이 전투에서 왜군 75300명이 조선백성들에 의해 괘멸된 희대의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7년 임진전쟁이 종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해서 저는 이 전투를 대첩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풍신수길 

 

이 대목에서 박 소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과 관련, 흥미로운 야화를 들려준다. 풍신수길(豐臣秀吉)은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일본을 통일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1592(선조 25) 풍신수길의 주도하에 일본이 명의 정복과 조선의 복속을 목표로 16만의 군을 한반도 남부에 파병하여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파죽지세로 한성, 평양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명의 원군, 그리고 이순신의 조선 수군으로 인해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1593(선조 26) 명과의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1596(선조 29) 9, 계속되어 왔던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었고(선조실록29116) (선조실록291221), 1597(선조 30) 7, 14만의 군으로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칠천량 해전을 시작으로 2개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석권하고, 경기도로 나간 후, 조선 남해안에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 점령을 꾀하였다.

그러나 울산성 전투에서 고전한 후, 일본군 사이에서는 전선을 축소하려는 무단파와 문치파 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598(선조 31) 8월 풍신수길은 62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박선호 소장은 저서 <백성의전쟁> 23쪽에 이런 글을 적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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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전투 사흘째, 왜군의 파상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성안의 아낙들은 나뭇가지까지 주워 기름을 끓이고, 물을 끓였다. 나이 든 남정네는 돌과 끓은 물, 기름을 날랐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잘 훈련된 병력과 화력 앞에선 중과부적이었다.사서는 왜군 27000여명이 하루 만에 산성을 함락하고, 조선 병사 500여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긍하기 힘들다. 성은 길이만 2.75킬로미터다. 그 숫자로는 방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중과부적의 숫자를 채운 것은, 공식 역사가 지워버린 백성들이었다.

 

 

정상 부근엔 산철쭉이 여전히 투명한 연분홍 꽃 무더기를 이고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다 싶었는데, 후두둑 꽃이 떨어졌다. 발밑엔 이미 떨어진 것들이 꽃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생화의 아름다움에 혹해 낙화의 슬픔을 잊고 있었다. 418년 전 권력자들이 버린 이 땅을 지키려다 그곳에서 스러진 꽃 같은 이들의 순절을 잊고 살아온 것처럼.

 

전투 사흘째인 817일 자정 무렵, 왜군의 파상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성안의 아낙들은 나뭇가지까지 주워 기름을 끓이고, 기름이 떨어지면 물을 끓였다. 나이 든 남정네는 돌과 끓은 물, 기름을 날랐고, 장정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들에게 던지고 부었다. 병졸들은 화살을 쏘고 칼과 창으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자들을 찔렀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잘 훈련된 병력과 화력 앞에선 중과부적이었다.

 

자정이 넘어가면서 군무장 유명개 거창 좌수에게 올라오는 보고는 절망적이었다. 무기고를 지키던 부인 정씨는 화살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었고, 서문을 지키던 정언남에게선 전황 대신 '싸우고 싸워도 끝이 없다'는 탄식만 전해왔다. 북문과 동문을 지키던 성주 백사림은 "적은 저렇게 밀려오고, 병사들의 사기는 다해가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탄식을 했다. 한가위를 갓 지난 음력 18일 새벽 달빛으로 성안은 가득했다. 그러나 수천명 백성의 손에 남은 건 맨주먹뿐이었다.(의사공현보유명개연보)

 

축시 무렵 비보가 날아왔다. '동문이 열렸다!' 장교 김필동이 군졸 20여명과 함께 문을 열고 왜군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동문이 뚫리면서 가까운 북문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성을 넘어 탈출하기 시작했고, 백사림은 전선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결국 백사림도 왜군 복장으로 변복을 한 채 탈출했다.

 

·서문을 굳게 지키던 안의 현감 존재 곽준, 함양 군수 대소헌 조종도에게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가토, 구로다 등 왜군 최강의 장수들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이들이지만 이제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무기고 옆 장석(지휘소 자리)에 모였다. 존재의 둘째 사위 강준이 말했다. "이미 적들이 성에 들어왔으니 피신해야 합니다." 대소헌은 말했다. "북문을 열어 자식과 여자들이 오욕을 당하지 않게 합시다." 대소헌은 한마디 덧붙였다. "존재와 나는 여기서 죽을 뿐."

 

존재는 우선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너희는 살길로 가라. 나는 여기에서 죽어야 한다." 유 좌수도 피신을 종용받자 "구차히 살아서 무엇을 하리, 너희들은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라"고 말했다. 대소헌은 산성으로 올라오기 전 이미 이런 절명시를 남겼었다. "성 밖에서 사는 것도 행복이었지만, 순원성을 지키다 죽는 것 또한 영광이로다."

 

왜군이 밀려왔고, 장석 위에서 버티던 존재는 쓰러졌다. 대소헌과 유 좌수도 무너졌다. 존재의 두 아들도 죽었고, 딸과 며느리는 치욕을 당하기 전 자결했다. 대소헌의 부인, 유 좌수의 부인도 자결했다. 유 좌수의 두 아들은 이미 14일 북문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거창 현감 한형의 부인 이씨도 순절했다. 아녀자들은 남문 서쪽의 벼랑으로 내달았다. 그곳에서 떨어져 내린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벼랑의 거대한 바위(피바위)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여명이 틀 무렵 황석산성 나흘간의 전투는 끝났다.

 

임진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치하의 편지(감사장)에서 이렇게 썼다. "성내에서 조선군 353명과 계곡에서 수천명을 죽였다고 하니." 황석산성에 올라 왜군과 결전을 치렀던 함양 안의 거창, 합천, 삼가, 초계, 산음 7개 현 백성들은 대부분 그렇게 순절했다. 많게는 7000여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이 나라 역사서에는 희생자를 7개 현에서 올라온 병졸 숫자만큼만 기록하고 있다. '왜적에 맞서 500여명이 순절.'

 

임진년 그렇게 참화를 겪고도 조선의 왕실과 조정은 여전히 무능했고 안이했다. 15971월 울산과 부산 일원에 상륙한 왜군이, 그해 7월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조정의 무능 때문이었다. 7월 말 왜군은 전군을 좌우로 나눠 우선 호남 정벌에 나섰다. 우군은 밀양, 창녕, 고령, 합천, 거창, 함양, 장수, 진안을 거쳐 전주성으로 가고, 좌군은 김해, 고성, 사천, 하동 등 물길을 따라 이동한 뒤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성에 입성하려 했다. 좌군은 45000여명, 우군은 75000여명. 우군이 많았던 것은 전주성 함락 후 북진의 주력부대였기 때문이다.

 

우군은 곽재우의 의병이 버티는 창녕 화왕산성은 비켜갔다. 그러나 황석산성은 그럴 수 없었다. 안의에서 전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게 육십령이고, 육십령으로 가는 중간에 버티고 있는 게 황석산이었다. 비켜가는 것은 등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군은 14일 산 밑에 도착, 정찰을 끝내고 15일 전투배치를 완료한 뒤 남문부터 공략했다. 그러나 군신으로 추앙받던 가토 기요마사가 치명상을 입고, 그의 부대가 퇴각할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16일 병력을 총동원해 공성에 나섰다. 이번에도 죽기를 각오한 조선 백성의 저항 앞에서 물러서야 했다. 17일에도 파상공세는 이어졌다. 늙은 부모의 목숨을 앞세워 투항을 유도하는 심리전도 병행했다. 성안 군민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운도 떨어지고 돌도 화살도 기름도 바닥을 드러내고, 심지어 화목도 떨어졌다. 해가 떨어지면서 다시 총공세가 펼쳐졌고, 동문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황석산성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고 함부로 승패를 단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감사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앞으로 좌군과 협동하여 실수 없게 작전하시오. 마에다 겐지 등에게 잘 말해 두겠소." 그건 치사가 아니었다. 치명적 손실을 입은 우군 장수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실제 이 싸움 이후 왜군의 조선 정벌 계획은 근본적으로 수정됐다. 우군은 좌군보다 3~4일 늦게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성에서 북진할 때 우군의 병력은 27000여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우군은 충청도 천안 근처의 직산 전투를 제외하고는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퇴각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으면, 일제는 한반도를 병탄하자마자 황암사를 불태웠다. 숙종이 산성전투 때 순절한 이들을 배향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었다. 안의군을 아예 폐군시켜 면으로 강등시켰고, 현청은 헐어버렸다.

 

지금까지 우리 사서는 왜군 27000여명이 단 하루 만에 산성을 함락하고, 조선 병사 500여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긍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산성에 한번 올라가 보면 안다. 험준한 능선을 잇는 산성은 길이만 2.75킬로미터에 이른다. 500명이 늘어선다 해도 6미터에 한명꼴이다. 그 숫자로는 방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중과부적의 숫자를 채운 것은, 공식 역사가 지워버린 백성들이었다. 군무장 유 좌수의 신도비 연보를 보면 산성엔 거창, 함양, 안의에서만 각 1000명 이상의 백성이 올라와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 산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이들이었다.

 

황암사는 2001년에야 황석산성 기슭에 다시 세워졌다. 황석산순국선열추모위원회 등 순전히 민간이 노력한 결과였다. 사실의 잘잘못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박선호 황석산성연구소 소장 등 역시 순전히 민간의 노력 결과였다. 황암사에 봉안된 위패에는 특별한 신위가 있다. 중앙에 3, 좌우로 3, 4위가 모셔져 있는데 정중앙에 있는 것이 '황석산성순국선열제위'. 무명의 희생자 곧 백성을 중앙에 모신 것이다. 다른 배향시설에서 백성은 언제나 권력자의 들러리일 뿐이었다.

 

충혼비 비문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싸움에서 이런 충의와 충용과 충절에 빛나는 호국의 충혼을 찾을 것인가." 시인 구상 선생이 별세하기 전 남긴 문장이다. 권력자들이 버린 전장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천명의 민을 기리는 마음이 절절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 잊혀진 충혼, 잊혀진 이름을 되찾아줄 것인가. 추모의 염이 아니라 부끄러움으로 고개가 꺾인다.

 

 

곽병찬 전 한겨레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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