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특집/본지 정상목기자, 산청군 심적사 칠성탱화(七星幀畵) 점안식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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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특집/본지 정상목기자, 산청군 심적사 칠성탱화(七星幀畵) 점안식 르포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2.04.30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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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적사 칠성탱화

 

추파당 홍유(泓宥)의 부도. 홍유는 1718년(숙종 44)년 5월 20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전라도 고창 방장산(方丈山)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지리산에 주석하였던 용담(龍潭) 조관(慥冠, 1700∼1762)에게서 공부하였는데, 선과 교의 묘리에 익숙하였던 조관의 영향을 받아 선교 양종 모두에 능통하였으며, 만년에는 특별히 선종에 귀의하였다. 또한 유교에도 밝아 불교와 유교를 비교한 저술을 남겼다. 1774년(영조 50) 5월 13일에 57세로 입적하였으며, 부도와 탑비는 심적사에 건립되었다. 제자로는 문연(文演)·천제(天濟)·관식(慣拭) 등이 있으며,『추파집』3권을 남겼다.
웅석봉

 

백두산이 뻗어 내린 산줄기가 우리나라 남단에 와서 또 한번 큰 산으로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지리산입니다. 산청 지리산 웅석봉 기슭에 나한도량 심적사가 중생들의 원을 듣고 뜻을 이루어주기 위해 고요히 숨 쉬고 있습니다. 심적사는 신라 경손왕(929)에 창건하여 인조7(1630)에 중건하였으며 6.25 동란을 피해 한 때 절이 산청읍내로 옮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1991년 심적사 복원 불사가 큰 염원으로 이루어지면서 오백나한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써 현존하는 당우로는 나한전과 심적선원 등이 있습니다. 나한전 안에는 여러 형태의 16나한상 등 500백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현 주지 스님이신 원돈스님께서는 중창불사의 원을 세우시고 많은 불자님의 모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벽송사주지시절 원돈스님(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스님께서 625전쟁때 파르티잔을 토벌한 순경(당시)에게 망고쥬스를 주고 있다. 원돈스님은 트라우마를 연구하고 있다. 구본갑 여행작가 사진.
제357의통존자(義通尊者)오백나한도, 고려 1235~123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심적사는 지리산 동쪽의 은숙봉 아래에 자리한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보전, 오백나한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나한전에는 6·25전쟁 때 삼봉산 동룡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옮겨온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羅漢)은 일체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자격을 지닌 불교의 성자이다.

나한이란 범어 아라한(阿羅漢, Arhat)의 줄임말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자라는 뜻이며 대승불교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서 석가에게서 불법을 지키고 대중을 구제하라는 임무를 받은 자를 말한다.

불가의 불제자 가운데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16나한이라고 하며 이들은 무량의 공덕과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 열반에 들지 않고, 세속에 거주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존자(尊者). 부처가 열반한 뒤 제자 가섭이 부처의 설법을 정리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 때 모였던 제자 500명을 ‘500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은 인간의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됐다. 중국의 당송(唐宋)시대에 유행했던 나한신앙은 삼국 후기부터 소개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서는 국가적인 행사로 나한재(羅漢齋)가 행해졌으며, 조선시대에 복을 주는 복전(福田)’의 의미로 신앙되어져 서민들과 가장 친숙한 존재로 여겨졌다.

 

 

 

지난 424일 심적사에서 칠성탱화 점안식이 있어 애써 찾아갔다.

심적사 주지 원돈스님은 몇해전 함양군 마천면 벽송사 주지로 주석했다. 이때 필자와 연을 맺게 되었다.

원돈 스님은 법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92년 해인사에서 법전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96년 통도사에서 청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봉암사 태고선원, 칠불사 운상선원, 대승사 대승선원, 영축총림 선원, 해인총림 선원, 천은사 방장선원 등에서 안거 수행을 했으며 벽송사 주지를 역임했다. 현재 제17대 중앙종회의원, 심적사 주지를 맡고 있다.

 

 

 

 

심적사 경내에서, 원돈스님과 정상목기자

 

 

 

 

심적사 뒷편에 칠성각이 있다.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다.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내부에는 칠성삼존불과 칠여래 등을 한데 그려넣은 칠성탱화를 모신다. 치성광여래·일광여래·월광여래가 삼존불이 되어 중심을 이루고, 삼존불 좌우에 칠여래와 칠원성군이 배치된다. 또 남극노인성 등 하늘의 천체와 관련있는 신들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전각의 명칭 칠성(七星)은 구체적으로는 탐랑·거문·녹존·문곡·염정·무곡·파군의 일곱 별로, 각각 부처로 바뀌어 칠여래가 되는데, 예를 들면 제칠파군성군약사유리광여래는 칠성 중 파군이 여래로 바뀐 것이다.

심적사 불자에 따르면 그동안 심적사는 공양간 보수공사와 칠성각을 새로이 조성하였습니다. 새로이 조성한 칠성각에 칠성여래 부처님과 칠성탱화를 봉안하는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칠성각은 우리 인간의 수명 복록을 주관하는 칠성님과 치성광여래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입니다. 칠성은 자손들의 복덕을 담당하는 탐랑성군, 사업이나 질병에서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는 거문성군, 업장을 소멸하는 녹존성군, 상서로운 일을 만나 소원을 성취케하는 문곡성군, 지혜와 변재로 중생을 구제하는 염정성군, 복덕을 구족하게 하는 무곡성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수명이 늘어나게 하는 파군성군 이렇게 일곱분의 성인을 말합니다. 칠성기도의 효험은 기도 재자들의 수명·복덕과 소원을 빠르게 이루어 주는데 있습니다. 심적사 칠성각 불사에 동참하시어 기원하는 바 모두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이어 불자는 심적사와 나한과의 연기설을 이렇게 말한다.

 

 

 

옛날 어느 절에 한 스님이 난리를 피하여 22존의 나한상을 짊어지고 지금의 심적사 근방에 쉬고 있을 때 나한상이 없어졌다. 흔적을 찾아 보니 지금의 심적사 절벽에 모여 있어 젊은 스님은 여기서 나한암을 지어 봉안하였다.

한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교통이 끊겨 식량과 불씨마저 떨어진 채 동지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동짓날 아침 부엌에 팥죽이 놓여 있고 불씨도 피고 있어 살펴보니 부처님의 입술에 팥죽의 흔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고 이듬해 봄에 탁발을 가게 되었는데 지난 동짓날 심적사 나한암에서 상좌가 찾아와 팥죽과 불씨을 보시했다는 신도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님은 나한암에 돌아와 더욱 신심을 굳게 하고 나한상을 모셨다고 한다. 나한암에 있던 나한은 한국전쟁을 피해 산청읍내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심적정사가 되었다.“

나한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심적사에 오백나한전이 조성된 것은 1991년이라고 한다.

당시 심적사 주지스님이 여의주를 들고 육조 혜능대사와 손을 잡는 선몽을 꾸고 나서 오백나한을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오백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었다. 부처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오백나한은 제각각 다른 얼굴들을 하고 있다.

 

 

심적사 원돈 스님은 누구인가?

 

 출가하기전, 스님은 중앙대학교예술대문예창작과를  다녔다. 동기로는 <너무아픈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작사가 유근  시인이다. 이 노래는 김광석이 불렀다.  

원돈 스님이 출가한 사연이 흥미롭다.

스님이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시골 할아버지가 손자야, 너가 꼭 보고 싶으니 모월모일 할아버지한테 오너라, 해서 할아버지 댁에 갔다고 한다.

 간 날 밤, 할아버지와 함께 잠을 자고 있는데 저승사자(監齋使者) 두 명이 방으로 쑥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저승사자 두 명이 소년(원돈 스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오므리고 휘파람을 불더랍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흡혈박쥐들이 무리 지어 우는 소리 같았다고. "소년은 혼비백산 무서워 고함을 내질렀지만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나 봅니다. 저승사자가 다녀간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할아버지가 그만…어릴적부터  삶과 죽음에 고뇌, 그는 젊은시절 출가하게  된다.

세월이흘러 몇해전 함양 벽송사주지로  주석하셨다.  그때 함양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셨다. 국내 최초로 함양에 트라우마센터를세우고자 했다.  

 

옆인물은   임창호 전 함양군수

 

 

 

 

정상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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