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환 군의원 “거창에도 로미오와 쥬리엣 스토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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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환 군의원 “거창에도 로미오와 쥬리엣 스토리가 있다”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2.04.0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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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이용구 지리산힐링신문편집국장

특별부록
이명행소설가가 기록한 선화공주 전말기
지금 가지리 갈지마을은 도량살리기 사업 전국최초 마을이고, 국경 백제와 신라를 넘나드는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져 있고, 조형물까지 설치되어 전국에서 해외에서까지 도량살리기 전국최초 사업이 알려지면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사랑이야기 조형물이 설치되어 관광객의 발길도 많아지고, 삼국시대의 전설을 더 알릴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또한 최정환 군의원이 조형물 설치에 적극 앞장서서 해 왔다.
 

 

존경하는 군민여러분! 더불어민주당 소속 거창읍 가 지역구 최정환 의원입니다.

옛길, 옛이야기, 옛사람들, 흘러온 그 세월을 새로이 기억하는 일. 역사. 사국시대 오랜된 국경의 도시 그 역사에 대하여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거창읍 정장리유물, 슴베찌르게 주먹도끼는 거창의 석기시대와, 초기철기 시대로 이어지는 대표적 유물이고, 양평리 유물 호형토기는, 청동기시대, 그리고 현재의 서울우유 부지, 거창사과테마파크조성지 등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괄목할 유구와 유물은 선사시대 고대 거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하였으며 실증적 자료들을 통해 경남 서부내륙의 고대문명을 재조명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유적입니다.

가야사문화 발굴 복원이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가야사 연구와 복원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고, 취임 후 국정과제로 선정되면서 부터입니다.

우리 고대사가 삼국사 이후부터 되다보니 삼국사 이전의 역사가 미흡하고, 특히 신라사에 덮여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야사는 경남을 중심으로 가야사 연구 복원은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고, 지금 거창군은 가야 문화유적 복원 및 관광자원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무릉리 고분, 석강리 고분, 개봉 분산성은 현재 국비를 확보해서 지표조사 및 정밀발굴중입니다.

삼국시대인 천사백년전 갈등과 싸움이 쉼 없던 거열산성, 이제 이곳은 우리 모두의 평화와 사랑을 염원하는 상징적 유산으로 거창군은 거열성을 국가사적 승격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5분 발언하는 최정환의원

 

기원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의 700여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이 있었고, 가야를 제외한 삼국만 존재했던 시기는 98년간에 불과 했습니다.

가야사에 대해서는 실학자들의 연구 동향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약한나라작은나라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치스럽게도 다른 나라들의 통치를 받기만 하던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 가야사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은 어디서 나온 것 입니까.

바로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역사가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설화 및 여러 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토대로 만든 임나일본부설 때문이었습니다.

가야를 포함한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를 재조명하고,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을 당당하게 물리칠 수 있는 방안이 가야사문화 발굴복원이라 생각합니다.

금귀봉 봉수대는 과거 국가 방어체계이자 통신수단이었던 봉수의 역사적 의미가 있고, 경상남도 기념물 제51호인 삼국시대의 무덤군인 개봉고분군은 5기중 2기는 발굴조사 했고, 나머지 3기도 발굴한다면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물378호 상림리 석조보살입상 부터 보호관찰소, 지원, 지청 신축부지까지 정밀학술조사발굴 해서 가야사문화 역사를 재조명해야 할 때입니다.

오래된 국경의 도시이자 이념의 국경으로 연결된 취우령과 선화공주의 설화는 그냥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쟁에서 희생된 민초들이 피맺힌 가슴으로 평화를 갈망하는 기도, 바로 그것이고, 국경너머 사랑을 찿아가는 길, 아홉산 취우령! 선화공주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리는 곳, 한없이 애처로운 국경의 사랑, 오래된 국경의 도시 이야기도 가야사문화 발굴에 포함하여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인모 군수님 임기 후반기 2년의 시작은, 현재 진행중인 가야사문화 유적 정밀학술발굴과 취우령, 선화공주의 설화 이야기를 포함해서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인 오래된 국경의 도시를 찿아 지역의 주민이 주인이 되어 함께 문화컨텐츠 발굴에도 적극 노력해서 행복한 내일을 준비하는 거창군 행정이 되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249회 거창군의회제2차 정례회 제2차 본회의(2020. 06. 24. 10:00)

 

 

 

 

특별부록

 

 

 

이명행소설가가 기록한

선화공주의 설화 이야기

 

 

이명행소설가

 

 

 

1. 598년 정월, 거창 수송대

<서동, 국경을 넘다>

 

 

 

 

598년 정월 중순 어느 날 석양 무렵입니다. 백제의 서동왕자가 호위대와 수행원들과 함께 지금의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의 수송대에 도착합니다. 이날 행차는 정월 보름날 서라벌에서 있을 연등법회에 참석하기 위한 행차였지요. 수송대愁送臺란 백제에서 신라로 보내는 사신을 맞거나 보내는 곳입니다. 이 이름은 신라에 비해 백제가 국력이 약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힘 약한 백제가 사신을 근심으로 보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지금은 수승대搜勝臺라 불립니다. 수송대를 통해 사신이 오갔다면, 이곳이 바로 신라와 백제의 주요통문이었을 것입니다.

서동은 법왕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삼국유사>의 일연입니다. ‘지혜가 출중했으며, 기골이 장대했다고 말한 사람은 <삼국사기>의 김부식이지요. 더불어 불과 2년 후면 왕위에 오를 서동이 마나 캐러 다녔겠는가라고 되물었던 사람은 단재 신채호입니다. 이를 정리해 다시 말씀 드리자면, 598년 신라의 궁중법연에 참석했던 열여덟의 서동은 기골이 장대했고 지혜가 출중했던 왕자 신분이었다는 거지요.

수송대에서 하룻밤을 묵은 서동은, 호위대를 물리치고 지명법사를 비롯한 몇 명의 수행원들만 동행한 채 아홉산 고개에 이릅니다. 거창읍을 향해 병풍처럼 펼쳐진 아홉산은 신라 진평왕 당시 백제와의 국경이었습니다. 일행은 백제의 마지막 마을 영승을 지나 고갯길에 오릅니다. 국경 초소에서 신분을 확인한 뒤, 고갯길을 내려와 신라의 첫 마을 가지리에 이릅니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579년 알야산성閼也山城 전투 이후로 20년 넘게 전쟁을 하지 않았고, 두 나라는 공히 중국 수나라와 화친하고 있었으며, 2년 전인 596년에는 사이좋게 일본에 기술자를 함께 파견하여 법흥사를 완공했던 선린관계였습니다. 이것이 백제 왕자 서동이 신라의 궁중법연에 초대되어 서라벌을 방문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입니다. 서동이 서라벌에 굳이 숨어 들어갈 이유가 없었던 거지요.

 

수승대가 있는 경남 거창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비룡분기점이 나오면 여기서 판암, 무주 방면으로 빠져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를 달린다. 이 도로를 달리면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갈라지는 산내분기점을 만나는데 거의 직진 코스에 가깝다. 대진고속도로 지곡I.C를 나와 안의 방면인 24번 국도를 이용한다. 계속 24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금천삼거리가 나오면 좌회전, 다시 교북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3번 국도로 바꿔탄다. 이렇게 계속 거창 방면으로 직진하면 마리삼거리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37번 국도 무주 방면으로 향하게 된다. 이곳부터 간간히 수승대국민관광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니 참고하며, 장풍삼거리가 나오면 다시 좌회전하여 직진하다가 길 왼편에 수승대 주차장에 닿게 된다.

 

2. 598년 정월 보름, 경주 왕궁

<궁중법연宮中法筵>

 

서동왕자와 지명법사등 수행원은 신라의 궁중법연에 참석합니다. 정월 보름에 열렸던 이 궁중의 연등회는 551년 진흥왕 이후, 등불을 밝혀 다과茶果를 베풀고 가무歌舞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며 부처님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던 성대한 축제였습니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백관과 귀족, 그의 자제들. 그 중 젊은 남자들은 화랑花郞이었겠지요. 진평왕이 백관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의 세 딸이 등장합니다. 덕만공주와 천명공주, 그 가운데 선화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자태가 눈부십니다.

 

향연饗宴이 시작되면서 이윽고 백제의 왕자 서동이 수행원과 함께 등장합니다. 수행원 중 지명법사가 눈에 들어오는군요. 서동왕자는 나아가 왕을 알현합니다. 진평왕 곁에 선 선화를 바라보는 서동, 그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도 시선은 선화에게 가 있습니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리는 대목이지요.

 

서동과 선화는 처음 만난 사이지만,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왕가는 이미 빈번한 교류가 있었습니다. 양국의 왕족과 귀족이 혼인한 일도 몇 차례나 있었고요. 그랬으니 혼기에 다가선 선남선녀의 왕가의 자녀가 이미 소문을 들어 서로를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선화는 서동이 연등회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을 이미 듣고 있었습니다.

 

가끔 서동과 선화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눈빛에 애틋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시간은 촌각이지만, 그들이 나눈 가슴의 시간은 천년세월이었습니다. 그 짧은 찰나에 천년의 눈빛을 교환했다면, 그 사랑의 찰나는 겁의 깊이를 가집니다. 처음 애틋했던 것이 벌써 불꽃이 되었습니다.

 

3. 궁정의 비원

<사랑의 확인>

홀로 쓸쓸하게 비원에 나와 거니는 서동. 서동은 홀로 처연한 밤을 지키고 있다가, 문득 인기척을 느낍니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선화가 서 있습니다. 놀라 일어서는 서동. 선화를 향해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습니다. 선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해 하지만, 이내 서동의 감정에 동화됩니다. 그때 나타나는 지명법사와 서동의 일행. 놀란 표정으로 다가와 그 중 몇 명은 주변을 경계합니다. 그들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키는 동안 밤이 깊어 갑니다.

 

 

4. 다시 궁정의 비원

<재회>

다음 날도 서동왕자는 비원에 나와 선화를 기다립니다. 어둠 속에 빛나는 눈들은 지명법사와 그 일행들입니다. 가끔 어둠 속에서 불쑥 몸을 드러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초조함. 지명법사가 서동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몸종 하나는 서동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줍니다. 그때 숲에서 선화가 나타나지요.

 

두 사람은 짧은 밤을 탓하며 밤마다 궁정의 비원에서 사랑을 키웁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쉬이 이루어질 사랑일 리 만무합니다.

 

서동의 증조부였던 성왕은 선화의 조부였던 진흥왕의 장인이었습니다. 진흥왕은 성왕의 딸과 결혼한 엄연한 사위였던 것이죠. 하지만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진흥왕은 장인이었던 성왕을 죽입니다. 지금은 함께 수나라와 화친하고 있고, 일본에 건축 기술자를 함께 파견하는 정략적인 선린관계에 있지만, 그렇다고 사적인 관계까지 원만해질 수는 없는 원수의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서동과 선화는 시름이 깊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두 사람의 사랑에는 건널 수 없는 거친 강이 가로 놓여 있었지요.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속절없이 깊어졌습니다.

 

5. 서라벌, 저자거리

<서동요>

결국 서동 일행은 거리로 쫓겨납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장터거리 모퉁이에 서동 일행이 퍼질러 앉아 있네요. 모두 지치고 허탈해 하는 모습입니다. 귀족 차림새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으니 오가는 사람들이 일행을 흘깃거립니다.

 

일행은 둘러 앉아 무엇인가 논의합니다. 지명법사, 서동에게 묘안을 내고 서동은 주억거립니다. 일행, 근처의 가게 안으로 사라집니다. 다시 가게에서 나온 일행의 복색이 싹 달라져 있습니다. 지명법사는 벙거지에 거지 차림이고, 서동 왕자 역시 영락없는 마동薯童이네요.

 

서동 일행이 길 가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무엇인가 나누어 줍니다. , 그런 것들이네요. 지명법사는 그것들만 받고 그냥 가려는 아이들을 돌려 세워 야단치고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밤마다 선화공주 궁궐을 나왔다네.

서동왕자 만나러 궁궐을 나왔다네.

왕자 공주 나눈 사랑, 마고할미 속았을까?

서동 선화 나눈 사랑, 삼신할미 놓쳤을까?

 

노래는 장안에 파다해졌고, 머지않아 지명법사의 이 묘안은 적중했습니다. 신라의 궁중에서 진평왕의 대노한 음성이 울립니다.

 

 

6. 궁전, 왕의 집무실

<진평왕의 진노>

백관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끌려온 선화, 아버지 진평왕에게 하소연을 해보지만 왕의 노기는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일행들은 모두 안절부절 못하고요. 백관들은 서동을 추방하고, 선화를 궁에서 내쫓아야한다고 주청을 합니다. 진평왕은 고뇌하지요.

고뇌 끝에 진평왕은 결국 선화를 궁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붙잡고 애원하는 딸을 매섭게 내칩니다.

 

 

7. 신라와 백제의 국경, 취우령

<선화, 국경에 이르다>

 

부여로 가는 길, 국경 초소. 신라의 병졸들이 끌고 온 서동 일행이 도착합니다. 허탈한 모습의 서동, 취우령에 서서 서라벌 쪽을 바라봅니다. 그때 반대쪽에서 백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삼엄한 대치. 서로 밀고 당기는 실랑이. 그런 와중에 백제 병사 일부는 서동 일행을 호위해 사라집니다.

서동이 백제로 넘어간 뒤, 선화 역시 궁에서 쫓겨납니다. 궁에서 나온 선화는 이미 지아비가 된 서동을 따라 장도에 오릅니다. 궁녀 정연을 데리고, 오랜 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이 바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 아홉산이었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험한 고갯길을 넘어 백제의 첫 마을 영승에 도착합니다.

 

 

8. 국경의 한 초라한 민가

<선화의 아이>

 

하지만 선화공주는 이곳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지아비를 좇아 국경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부여의 서동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 또한 없었습니다.

 

선화는 영승에서 몇 개월을 머뭅니다.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따로 없었지요. 고작해야 새로 사귄 국경마을 사람들과 함께 경치 좋은 수송대에 가거나 행기 숲에 가서 소풍을 즐기는 정도였습니다. 수승대 거북 바위 근처 소에서 선화가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고요. 행기숲에도 선화공주와 관련한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님을 향한 길은 삼엄하기마저 한 이국이었고, 궁으로 돌아가기에는 아버지 진평왕의 분노가 너무 깊었습니다. 절망이 독처럼 그녀의 몸에 퍼졌지요. 지친 선화는 결국 이곳에서 쓰러집니다. 선화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선화는 아기를 낳습니다. 아홉산 취우령 서낭당.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립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계절은 가을이지요. 별은 초롱 하지만, 그 초롱함이 더욱 서글픕니다. 공주는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더욱 절망적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주위의 아낙들이 안절부절 못합니다. 산고의 정점입니다. 순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낙 하나가 아기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러나 가느다랗게 경련하며 절명하는 선화. 그녀의 죽음은 백지장처럼 차고 창백합니다. 비가 내립니다. 고갯길에 내리는 빕니다. 온 하늘을 적십니다. 온 산하를 적시는 그것은 눈물입니다. 선화공주의 임종을 지킨 궁녀 정연이 오열을 터트립니다.

 

바로 그 고갯길, 서낭당에서 오열이 터집니다.

이곳 이름이 취우령입니다. 취우령은 한자로 取雨嶺이지요. 비를 취한다는 뜻을 가졌는데, 이 이름의 가 상징하는 것은 눈물입니다. 선화의 죽음, 이 비극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이것이 선화공주와 관련하여 경남 거창에 전해지고 있는 세 번째의 전설입니다. 14백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곳에 전해져 온 이 고귀한 사랑의 증언입니다. 취우령은 거창군 거창읍 아홉산의 아홉 개 봉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라의 마지막 마을인 가지리에서 이 고갯길을 넘어가면 백제의 첫 마을인 영승이 나옵니다.

 

 

영승, 선화는 여기서 반지를 분실

 

 

9. 무왕의 분노

<전쟁 또 전쟁, 그리고 경왕녀>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서동은 백제의 왕이 됩니다. 무왕(30대왕, 재위 600641)입니다. 무왕은 뒤늦게 이 취우령의 슬픈 이야기를 접하게 되지요. 선화공주의 궁녀 정연이 취우령 서낭당의 무녀가 되어 그때까지 그 아기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뒤늦게 백제의 수도 익산에 알려졌던 것이지요.

무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무왕은 선화의 혼령을 위무하기 위해 익산에 미륵사를 건축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선화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나라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지요. 24년 동안 무려 12번의 공격이었습니다. 공격은 집요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628, 진평왕이 당나라에 하소연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 태종은 무왕에게 진정하라는 조서를 보냈다지요. 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순종하겠다고 했지만 바로 그 이듬해 봄 다시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합니다. 무슨 한이 맺혀 2년에 한 번씩 장인의 나라를 그토록 공격했던 것일까, 하고 삼국유사를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은 선화와 서동의 사랑을 믿지 않기도 했지요. 그러나 거창의 취우령에 얽힌 전설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 분노를 이해합니다. 선화를 향한 지극한 마음에 얼마나 깊은 한이 맺혔으면 그랬겠나, 하고요.

 

취우령 서낭당에서 탄생한 아기는 무왕에 의해 수습됩니다. 그 아기는 일본의 여러 문헌에 선화공주와 무왕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경왕녀입니다. 무왕이 죽은 다음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이 즉위하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교기의 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소재 아홉산의 취우령.

 

 

바로 이곳에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처절하고 애틋한

<서동요>의 풀리지 않던 이야기의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서동요>를 보면 익산의 미륵사는 선화공주의 서원誓願에 의해 무왕 때 지어졌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륵사의 창건주는 선화공주인 셈인데요. 그런데 왜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미륵사 서탑 사리 봉안기>에 적힌 무왕의 이름이 선화가 아니고 사택적덕 딸이었을까요? 그리고 서동은 왕이 되고 난 뒤, 왜 장인의 나라를 그토록 수 없이 공격하는 패륜을 저질렀을까요? 그 풀리지 않았던 이야기의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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