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웅 경남도의원이 들려주는, "함양군의 자랑 허영자 시인" 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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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웅 경남도의원이 들려주는, "함양군의 자랑 허영자 시인" 은 누구인가?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22.03.1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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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근산성 사진=조광환 기자 010 5056-0556

며칠전 함양군 수동면 사근산성 밀착취재차 사근산성을 향했다. 김재웅 경남도의원이 동행해줬다. 추모사당 한 켠에 허영자 선생의 추모시 그리고 여강 이창구 선생 글씨가 보였다. 

 

 

동행취재 김재웅 도의원 

 

 

허영자 시 여강 이창구 글씨  

 

 

사근산성에서 필자 

 

 

 

 필자가 자랄 무렵, 거의 문학의 여신이었던 허영자 선생 글씨가 왜 저기에 붙어있을까? 김재웅 도의원이 설명해준다. 

"우리 함양 출신입니다"

"오, 그래요?"

 

김재웅 도의원이 사근산성을 걸어가며 허영자 시인에 대해 설명해준다. 

김 도의원의 구술을 필자(조광환)가 정리했다. 

 

 

 

 

함양이 낳은 최고의 서정시인

허영자 시인

 

허영자 시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절제의 아름다움이다. 함양이 낳은 최고의 서정시인이다. 허영자 시인을 두고 평론가들은 한국 시문단의 옹달샘과 같은 이정표이다. 도도하거나 창대하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통해 창조된 언어들은 한국 시사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존재다라고 말한다. 허영자 시인은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명문 경기여고와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노천명 연구>로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했으며, 성신여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허영자 시인 

 

 

내 고향 함양은 내 문학의 영원한 모티프

 

1962년 박목월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도정연가,사모곡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 어느 날〉 〈〉 〈자수등이 있으며 주요 시집으로 가슴엔 듯 눈엔 듯》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그 어둠과 빛의 사랑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면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을 수상했다.사모곡(思母曲)으로 등단한 허영자 시인은, 1963년 김후란(金后蘭) 등과 함께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여성시인들의 순수시 동인 청미회(靑眉會)’를 조직하고 활발한 동인활동을 펼쳤다.

허영자 시인은 노천명, 김남조 시인과 더불어 한국 현대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허영자 시인은 시가 지닌 언어의 단정함과 시의 품격을 엄숙히 지켜온 서정시인 중 한 사람이다. 1938년생인 허영자 시인은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 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동 중이다. 특히 고향 함양에 대한 사랑은 늘 한결같다. '고향 함양은 내 문학의 모티프'라고 언제나 말한다. 죽을 때까지 시인이고 싶다던 시인의 바람대로 그의 영혼을 통해 쓰여진 시()들은 생명력을 가지고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리게 만든다.

 

행복(幸福)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윗 틈새 같은 데에

나뭇 구멍 같은 데에

 

幸福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지난 2009년 함양군은 허영자 시인의 시비가 고향 함양군 유림면에 세워졌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 은발을 비롯해 자수’ ‘작은 기도등이 새겨졌으며 영원히 함양에서 남게 되었다.

 

은발

 

머리카락에

은발 늘어 가니

은의 무게만큼

고개를 숙이리.

 

 

() 은발에 대해 장석주 시인은 젊음이 축제고 화려한 가장행렬이라면, 노년은 순례들을 끝낸 뒤 그것을 반추하며 보내는 인생의 정점이다. 머리칼은 서리 내린 듯 은발로 변하는데, 검은 머리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다. 은발은 그 과거를 지나서 도달한 현재다. 과거란 죽음을 낳기 위한 태반처럼 한 인간의 주위에서 자라”(존 버거)나는 것! 노년엔 인생의 의무라는 무거움에서 놓여난다. 은발이란 무거움과의 작별인 셈이다. 오만과 미성숙과 무분별과 시행착오라는 젊음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것. 은은 얼마나 가벼운가! 은만큼 가벼워진 영혼이라니! 노시인은 은의 무게만큼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은발이 잘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일부러 돌아서서 그를 한 번 더 바라본다.’라고 평했다.

 

시인의 영혼은 자유롭되 시는 단정해야 합니다

 

허영자 시인은 대학시절인 4.19 때 목숨을 걸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집 앞까지 데모를 하였다. 서울의 모 종합지와의 인터뷰에서 허영자 시인은 서울 시내 8개 대학 국문과 학생들이 모여 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함께 만났던 사람들 중에 문인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4·19 세대입니다. 죽을 각오로 이기붕 씨 집 앞에 가기도 하였지만 살았습니다. 내가 만약 일찍 죽었다면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유치환, 조지훈, 이한직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격려하며 쓰신 시를 읽고 울기도 했구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4·19 이후에는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 한동안 땅만 내려다보고 다녔다고 했다.

영원히 시인일 수밖에 없는 허영자 시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나의 영혼은 방목형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영혼은 자유롭되 시는 단정해야 합니다함양 사람들은 언제나 방목형 영혼을 가진 허영자 시인을 존경하고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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