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富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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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富者 이야기
  • 지리산힐링신문
  • 승인 2019.12.31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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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싶었다

 

 

글|이철우(전 함양군수)

 

# 나, 어릴 적, 할아버지들은 사근(함양군 수동면) 이 부자(富者)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할아버지들이 이 부자 이야기를 한 것은 담 밖의 경주 최 부자는 모르고 울 안의 사근, 이 부자가 제일 부자로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근 이 부자는 민초들이 화제의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한 드라마틱한 소재를 갖고 있었다. 사근 이 부자의 재산을 일군 사람은 이민종의 아버지 이석신이다. 이석신(碩信;18561931)은 함양군 유림면 차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석신은 은수저 물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가난한 별 아래 태어났다. 그런데 명당에 부친을 모시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도깨비 방망이가 있어 금 나와라 뚝딱해야만 가능한 일이 생긴 것이다.

 

 

호기심과 부러움이 겹쳐 입으로 전해지면서 살이 붙어 신화적인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벼락부자가 된 사례가 더러 있기는 하다.

서양은 과학적 근거를 갖는 반면, 동양은 신비적 요소가 많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라고 부른다. 유전과 금광을 찾아 너도 나도 가자! 서부로를 외치며 몰리던 골든 러시 시대가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유전을 개발하거나 금광을 캐어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는 일이 속출했다.

이석신이 청년시절 마을 앞 길가 논에서 김을 매다 나무그늘 앉아 새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걸승이 지나가다 물 한 사발 적선하라고 청했다. 흘러가는 물도 떠주면 적선이 된다고 했다. 자리를 권하고 꽁보리밥이지만 찬 물에 말아 나누어 먹으며 살기 힘든 민초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은 일어서면서 마을 뒷산 서당골의 소나무를 가리키며 저곳에 조상묘를 쓰면 금시 발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러주었다. 금시발복이라? 얼마나 구미당기는 말인가.

그러나 그 곳은 동네 뒷산이라 마을사람들의 반대로 묘를 쓸 수 없는 일종의 금장지였다.

 

 

#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싶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열병을 앓았다.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도 말이 없고 먼 산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등 넋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아버지 묘를 옮기기 시작했다. 한 달이 멀다하고 논두렁, 밭두렁, 앞산 중턱, 냇가 등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별 미친 놈 다보겠네. 미친 놈 때문에 죽은 제 아비 생고생 한다며 혀를 찼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뒷산에 묘를 옮겼다. 언제쯤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인가 하고 설왕설래하며 대수롭잖게 여겼다. 그런데 마을 뒷산에 묘를 쓴 후 서울로 줄행랑을 놓았다. 마을사람들은 묘를 옮겨야 한다고 야단이었다.

조상을 숭배하는 우리 선조들은 남의 묘에 손을 대지 않는다. 속앓이를 하면서도 묘 주인이 없어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울로 간 이석신은 한 샘이란 지리학을 하는 사람의 소개로 일본인이 캐다가 폐광이 된 금광을 샀다. 운이 좋았다. 쉽게 금맥을 찾았으며 매장량이 많았다. 이석신이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풍문으로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미친 놈 허풍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고향에 와서 잔치를 베풀자 마을사람들은 명당 주인은 따로 있는가보다 라는 말을 하며 묘 쓴 것을 용인했다.

많은 돈을 들여 차의 마을에 재실을, 부자 기운이 강하다는 연화산 아랫마을 사근에 대저택을 지었다. 쌀 됫박에 인심난다고 인부들에게 품삯을 후하게 지불하여 인심도 샀다. 숱한 이야기꺼리와 많은 재산을 남긴 그도 죽어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차의 마을 서당골에 묻혔다.

이석신의 후손들 중에는 이석신 덕에 살아간다며 고맙게 여겨 선조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분에 넘치는 대우를 해주고 있다. 4대조 봉사라 한다. 조상을 추모하는데 4대까지는 제사를 지내고 5대조부터는 시사를 지내는 것이 관례다. 1대는 30년을 기준으로 한다.

 

 

5대조는 대략 150여년의 세월이 지나야 한다. 그런데 사근 이 부자네 집안에서는 자신들을 잘 살게 한 이석신이 타계한지 80여년밖에 안되고 손자들이 살아 있을 때인 오래전부터 시제를 지내고 있다. 특별대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이석신의 아들 이민종은 슬하에 43녀의 자녀를 두었다.

경기여자 중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올해 76세의 숙영이 7살이던 해방되던 해 가족이 서울로 이사 갔다. 첫딸 귀영은 남부군 부사령관 하준수와 결혼하였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 이 부자네는 서민들이 부러워하던 그 좋은 집을 지키지 못했다. 빨치산 두령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 이유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이 부자네 집은 나주 임씨 종중으로 넘어갔다. 나주 임씨들은 화산서원이란 간판으로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정부지원을 받기 위해 곧 집을 헐고 서원 형태로 지을 계획으로 있다. 지난해 약대를 나온 셋째 아들 필영이 작고하면서 이민종의 자녀 중 남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숙영, 무영 두 딸만 생존해 있으나 이들은 출가외인으로 친정집 일에 관심이 없었다.

당대에 천석꾼이 된 이야기는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신기루요, 한편의 소설 같다. 경주 최부자처럼 부를 이어갈 윤리적 기준이나 가풍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졸부였기에 부를 관리할 가풍이나 유지비결을 들먹일 겨를이 없었다. 다만, 후세사람들에게 부귀를 누리는 것이 선업, 보은의 결과라고 믿게 하는 참으로 매력 있는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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